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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작가 #9

북노마드 2023. 10. 3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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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나는그럭적럭 1학년을 이겨내고 2학년이 되었다. 1학년을 거의 술로 보내서 헛되어 보냈다고 생각하여 2학년이 되어서는 인생을 똑바로 살아보겠다고 결심을 하였다. 그렇다고 거창한 걸 마음 먹은 건 아니었다. 그저 술자리를 줄이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효과가 좋았다.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술을 퍼 마시고 다니는 동기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느 정도 우월감마저 느꼈으니까. 문제는 권태로움이었다. 사실 시간이 이렇게 긴 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하긴 대학교에 올라와서 자유롭게 된 대다수의 시간을 술을 마시는 데 쓰거나 술을 깨는 데 써 버렸으니 다른 걸 생각할 틈 따위는 없었다. 근데 그 시간에서 술을 지워버리니 나는 긴 자유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 지 막막했다. 결론은 멍- 때리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날도 한가로이 봄바람이 부는 어느 날이었다. 나는 나와 같은 이유는 아니겠지만 어떤 이유로든 – 살을 빼야겠다든지, 잘 보이고 싶은 남학생이 있다든지, 가정형편이 안 좋아서 정신을 차리고 공부를 해야 한다든지 – 술을 끊은 동기들과 함께 잔디밭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네들도 나와 같이 자유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다만 그렇게 붙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꽤나 시간을 잘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어찌됐든 같은 행위를 영위하는 또래집단이 있다는 것은 다들 그렇게 사니까, 라는 집단의식을 형성시켜줘 심리적 안정감을 부여하니까.

 

수요일은 가장 따분한 날이야.

 

그러게 말야. 수요일은 어떻게 오전 10시에 수업이 다 끝나 버리냐.

 

가끔씩 인생에서 우연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우리 셋은 1학년 때는 그다지 말도 섞지 않는 동기였다. 2학년 1학기 수강신청을 할 때도 각자 다른 자리에서, 각자 다른 시간에 수강신청을 했다. 그런데 수요일 오전 10시에 끝나는 전공수업을 딱 하나 신청하고 그 이후에는 어떤 수업도 신청하지 않았다니. 물론 논리적으로 따져 보면 수요일은 2학년에게 허락되는 전공수업이 하나밖에 없기는 하다. 그 뒤 시간을 보통 교양수업으로 채우는데 아마 수강신청을 할 때만 해도 우리 셋 다 1학년의 치기가 지속되리라는 착각에 빠져 있었나 보다. 그러니까 일주일의 중간에 자리잡은 수요일은 하루 종일 놀아버리기, 이런 걸 상상하고 있었는데 막상 그게 현실이 되자 일주일 중에서 가장 따분한 날이 되어 버렸다. 보통 때 같으면 오후 2시나 3시 정도부터 죽치고 앉아 있어야 할 잔디밭에 오전 10시부터 앉아 있다. 아직 밤새 내린 이슬이 완전히 마르지 않아 사보를 무더기로 가져와서 깔고 앉아야 했다. 모두들 공허한 눈빛으로 – 누가 보면 전혀 일행이 아닌 것처럼 - 각자가 보고 싶은 방향을 쳐다보고 있었다.

띡- 그때 문자가 하나 들어왔다. 고요한 아침 시간의 공허한 잔디밭에서 그 소리는 모두의 시선을 단번에 집중시켰다.

 

뭐야, 뭐야?

 

문학과 지성 수업 레포트 결과가 나왔습니다. 박교수님실로 찾으러 오세요.

 

어? 너 그 수업 들었어? 어떻게 들었어? 원래 알고 신청한 거야?

 

박교수. 은색 머리의 은색 뿔테를 쓴 나의 ‘은마’의 실제 성이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내 머릿속에는 언제부턴가 본명보다는 은마라는 별명으로 굳어져 버렸으니까. 대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어떻게 은마의 소문을 들었겠는가. 우연히 신청하게 된 수업이 박교수의 수업이었고 그렇게 인기 있는 교수인 줄도 첫 수업에 알게 되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그의 수업에는 – 나와 같이 – 정식으로 수업을 신청하는 사람 말고도 그의 수업을 청강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공식적으로 청강 제도가 없는 수업이었지만 학생들도 그렇고 정작 박교수도 그렇고 그런 것을 가지고 아무도 왈가불가하지 않았다.

 

근데 이 교수 참 특이해.

 

맞다. 정말 특이한 교수다. 박교수는 학생들의 성적을 늦게 처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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