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번. 비밀번호의 준말. 통장 비밀번호. 회사 계정 비밀번호. 온갖 온라인 사이트의 비밀번호. 비번을 들여다보면 재미있다. 나의 경우 비번은 보통 그 당시 좋아하는 사람의 이니셜을 따서 붙여진다. 숫자만 쓰이는 비번이라면 좋아하는 사람의 생년월일이나 핸드폰 번호를 즐겨 사용했다. 나의 성향을 파악한 사람은 – 특히 그게 나의 연인이라면 - 쉽사리 내 계좌의 돈을 꺼내 쓸 수 있으리라(웃음).
지금은 나이가 먹어 그 번호들이 혼재되어 있다. 혼재되어 있다는 말그대로 여러 사람들을 사랑했다는 말이다. 혹자는 결혼을 했고, 혹자는 혼자만의 상상으로 끝나기도 했고, 혹자는 썸만 타다 끝난 경우도 있다. 세월이 흘러 비번을 들여다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과연 사랑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당시에는 울고 불고 얘가 아니면 나는 못 살 것 같았는데도, 지금 돌이켜 보면 철부지 같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경우에는 진짜 결혼했더라면 큰일날 뻔 했다 라는 섬뜩함마저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지금의 와서는 새로 이는 감정들이 있더라도, 쉬이 그 감정들을 토해내지 못한다. 나이가 있어서일까, 아니면 그저 두려운 것일까, 아니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셋 다일까. 이런 고민들이 그다지 건설적이지 않고 부질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극단적으로 생각해보면 그저 이런 감정들이 다시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그런 감정들이 일어나는 것을 즐겨볼까도 한다.
나에게 있어서 그 감정들을 즐긴다는 것은 일련의 창작활동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소위 창작가라 일켣어지는 사람들이 연애를 많이 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보다 더 강렬한 자극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쌍방향이든 일방향이든 뇌 속에 강력한 호르몬을 분비케 한다.
나는 그런 감정들이 일어나는 것을 외려 즐기는지도 모르겠다. 가장 힘들 때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시기이다. 물론 아무런 감정이 없을 수가 없다. 아마도 무료함이나 권태로움이 있을 것이다. 글을 쓴다든지, 흔히들 영감이 떠올라서 노래를 작곡한다든지. 베토벤처럼 위대한 곡은 아니지만 그냥 나 혼자 들어서 좋으면 된다는 주의다. 창작의 관점에서 본다면 실은 그런 감정들을 일어나는 것은 축복에 가깝다.
요새는 그런 감정들을 혼자 감당한다. 좀더 어릴 적에는 친구들에게 그런 감정들을 토로하고, 상담하고, 소위 말하는 처방을 찾아 다녔다. 그 처방이라는 것은 상대와 잘 해보고 싶다는 미래를 품고 있다. 지금은 그런 자리를 만들지 않는다. 애초에 만들 필요가 없다. 어떻게 잘 해 보고 싶은 마음이 없으니까.
혼자 감당한다고는 해도 이 감정이라는 게 무지 웃긴 녀석이다. 어떤 날은 슬프기도 하고, 어떤 날은 설레기도 하고, 어떤 날은 질투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어떤 날은 그저 그런 날도 있으니 말이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도 우리는 사랑이라는 감정, 슬픔이라는 감정에 사로잡힌다. 요사이 일방향의 감정에 익숙해진 나에게는 훗날 가상의 존재와의 사랑도 –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처럼 상대가 반응을 해 준다면 –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영화에서처럼 회사가 내가 사랑하는 존재를 회수(?)하여 간다면, 실제로 무척이나 슬플 것 같다. 심리학적으로 얘기하자면, 애착을 가진 존재와의 분리로 인한 상실감일테다. 왜, 오래 쓴 만년필과 헤어질 때도 가끔 슬피지 않는가.
비겁하지만 나는 어찌됐든 감정에 대해 솔직하려고 노력하지만, 끝끝내 표현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 앞서 밝혔지만 - 나이가 있어서인지 아니면 그저 두려운 것인지 아니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셋 다인지 나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면 실제로 나는 가짜 감정에 속고 있는 것일까.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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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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