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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서울대

by 북노마드 2024.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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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또각또각또각

 

내 앞에서 그의 걸음이 멈췄다. 잘 생긴 남자 미술 선생님. 나는 그 선생님을 좋아한다. 쌍꺼풀 있는 눈, 자상한 눈빛, 인자한 미소, 관리한 듯 안 한 듯 자연스럽게 난 턱수염, 자연스럽게 난 은발. 그의 향기까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당시의 대다수의 남자들이 그랬듯이 향수 같은 건 뿌리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가 – 당시의 거의 모든 교사들이 그랬듯이 – 오른손에는 회초리 끝을 쥐고는 자신의 왼손바닥을 반대편 끝으로 닿을 듯 말 듯 두드리면서 교실 안을 돌고 있었다. 학생들이 그림을 잘 그리고 있는지 살피고 있는 것이다. 앞에 모델로 나가게 된 학생은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는 선생님의 지령 때문에 잔뜩 표정이 긴장되어 있다. 녀석을 하나씩 뜯어서 그리고 있었다. 걸음을 멈춘 그의 구두가 보였고 나는 슬며시 그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그의 인자한 미소가 살짝 경직된 표정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가 손을 내밀어 내 스케치북을 들어올렸다. 내 주위의 있던 아이들도 무슨 일인가 싶어 그와 내 스케치북을 쳐다 보았다. 그가 내 그림을 살폈다. 나는 큰 실수라도 한 기분이었다. 곧 버럭 같은 음성이 터져 나오고 교실 앞으로 불러나가 손바닥이나 엉덩이를 회초리로 맞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유는 별로 상관 없다. 그 당시에는 그런 시대였으니까.

 

너-

 

그의 음성이 길게 늘어지면서 잠시 멈췄다.

 

미대 갈래?

 

그때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속으로 그 말을 듣자마자 아니요, 전 서울대 가야 하는데요, 라고 답을 했을 것이다. 어렸을 적부터 – 아마도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 아버지는 나를 앞에 앉혀 놓고 서울대에 가야 한다고 일장연설을 늘어놓으셨다. 이유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그래야 성공한다는 논리였던 것 같다. 너무 오랫동안 들었던 탓에 세세한 기억은 내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삭제를 해 버린 모양이다. 아무튼 그런 말을 몇 년째 듣게 되면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시크릿, 이라는 해리 포터 마법서 같은 자기계발서에 따르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기 마련이니, 아버지의 갈망대로, 그리고 그가 내게 입력해 놓은 언어의 힘대로 마법이 이뤄져야 할 터지만, 실상은 반대였다. 아버지의 마법의 주문을 들을 때마다, 내 안에서는 반발심이 일어났다.

 

나는 절대 서울대에 가지 않을 거야.

 

그런 반발심이 처음부터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처음에는 얼마나 들어가는 게 어렵길래 아버지가 이렇게 어린 우리 형제들에게 이렇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숱하게 말을 하는 것일까, 싶었다. (2024.01.04) 그렇지만 먹기 싫은 반찬을 몸에 좋다는 이유만으로 억지로 먹으라고 하면 – 이를테면 콩자반이나 연근조림은 어찌나 극혐이던지 – 더욱 먹기 싫은 것처럼 굳이 선호가 없는 대학교에 계속 입학을 강요하는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이 나도 모르게 조금씩 자라났던 것 같다. 게다가 자아도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조매한 아이였지 않는가. 물론 지금도 그다지 성숙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무엇보다 그 반발심을 시멘트가 보양되는 것처럼 굳힐 수 있었던 것은 치솟던 중학교 시절의 성적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곤두박질쳤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는 이미 미대로 진로를 결정하기에는 늦은 나이었고, 무리하게 미대로 방향을 틀 수도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나의 성적과는 상관없이 서울대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아버지 때문이었다.

 

사실 고등학교 때 전과목이 다 어려웠지만 개인적으로 수학보다도 영어가 어려웠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영어수업을 듣고 있는데 하나도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그때 내 자리 바로 앞에서 우리 반에서, 아니 전교에서 영어성적 하나만은 줄곧 탑을 찍고 있는 남자아이가 앉아 있었다. 물론 그 아이의 비법은 –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지만 - 쉬는 시간이나 자율학습마다 팝송을 듣는 거였다. 당시에 나는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었지만, 그날은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툭툭- 그 아이의 등을 쳤다. 아이가 돌아봤다. 언제나처럼 귀에 이어폰을 꽂고는(당연히 팝송을 듣고 있었을 것이다).

 

이거 설명 좀 해 줄래? 이해가 안 되어서.

 

나는 조금 전 영어수업 시간에 배웠던 영어교과서의 한 페이지를 가리키며 부탁했다. 내 우려와 달리, 그러니까 내 부탁을 아무렇지도 않게 쌩까거나, 갖은 면박을 주는 행위는 일체 없었고 아이는 친절하게 – 눈을 뻐끔거리며 - 설명해줬다. 나는 아이의 설명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땀한땀 정성스러운 설명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건성은 아니었다. 그런 것은 절로 느껴진다. 아이는 설명이 끝내고 나서 다시 눈을 뻐끔거렸다. 마치 수족관 안의 붕어가 바깥 세상은 전혀 보지 못하고 평화로이 바로 앞의 투명한 수족관 안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알았어, 고마워, 라고 내가 말하자 아이는 고개를 휙- 돌려 다시 영어 책을 들여다 봤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고등학교 때 영어와의 나의 인연 말이다. 그때 나는 내 자신이 영어에 전혀 재능이 없다는 기분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영어를 가장 잘 하는 아이가 나름의 정성을 다해 설명을 해 줬는데도 이해를 하지 못하는 ‘내’가 문제가 있는 거라고 단정지어 버렸다. 성인이 된 이후에 그때를 여러 번 돌아보곤 한다. 그때 내가 조금 더 설명을 잘 하는 아이와 만났다면, 그때 그 아이가 조금 더 열정적으로 설명을 해 줬더라면, 그때 내가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번 물어봤다면, 내 영어는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그랬다고 해도 영어를 제대로 못했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영어에 대한 흥미는 덜 떨어지지 않았을까. 그래서 수능에서 더 좋은 영어성적을 받아서 서울대는 아니더라도 서울대 근처 레벨의 대학에 진학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래서 아버지를 조금이라도 더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을 가끔, 아니 자주 했다. 지금보다 조금 더 어린 나이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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