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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61

by 북노마드 2022.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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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르륵- 꿈인가, 아니면 취한 현실인가. 모르겠다. 사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나는 밖에 나와 있었다. 내 손에는 쓰레기 봉투가 들려 있었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손 끝에 들려 있는 쓰레기 봉투가 너무 무거웠다. 지금으로서는 쓰레기 봉투를 해치우는 게 중요했다. 쓰레기 봉투를 쓰레기 소각장에 가지런히 두고는 나왔더니 누군가 쓱 내 앞을 지나갔다. 여자 아이였다. 나의 노래를 좋아하는 여자 아이. 그러니까 무대를 내려오고 나서는 처음 생긴 팬. 그러고 보니 팬 1호, 이런 게 나에게는 없다. 생각해 보면 붙일만한 팬들이 있지도 않았다. 아무리 인기 없는 뮤지션이라도 일부 매니아층이 형성되는데, 나는 그런 팬들이 없었다. 마치 뭐랄까, 물 위에 우연히 떨어진 하얀 티슈 한 장 같다고나 할까. 처음 몇 초간은 근근이 버티는 것 같아 보이지만 급속도로 빠르게 물에 흡수되어 어디 있었는지도 찾기 어려운 얇은 티슈 한 장. 내 노래는 세상이라는 거대한 바다 위에 하얀 티슈 한 장 같이 사라져 버렸다. 이제 내 노래를 듣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 속상하다. 아니 속상해 하지 말자. 그런 걸로 속상해 봤자 바뀔 게 없다. 젖은 티슈가 다시 마르는 기적은 모세가 와도 일으킬 수 없을 테니까. 팬 1호로 족하자, 그렇게 생각하자고 다짐하고 눈으로 아이를 좇았다. 그런데 이 시간에 아이는 어디를 가는 것일까. 아이의 뒤를 좇았다. 당당하게 얘, 어디 가니, 물어도 될 것을 이상하게 슬그머니 뒤를 좇게 되었다. 그 언젠가와 오버랩이 되었다.

 

 “그냥 저 택시 따라가 주시면 돼요.”

 

그때처럼 나는 유능한 사립탐정이 된 기분이었다. 물론 결국에는 그들의 행위를 몰래 훔쳐 보는 관음증 환자가 되어 버린 셈이지만(키득키득).

 

나는 그들과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를 같이 탔고, 같은 층에 살고 있었다. 물론 동이 달랐지만. 그들은 8층에서 내렸고, 나는 10층까지 올라갔다 다시 내려와서 건너편 내 집으로 와서 그네들을 지켜 봤다. 뜬금없이 그 기억이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고 보니 아이는 10층에 살고 있었다. 그날 그러니까 10층에 올라가는 척 하는 날, 나는 10층에 살짝 내렸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엘리베이터라 바로 내려가면 될 일이었지만 보이지 않는 어떤 실이 나를 밖으로 이끄는 것만 같았다. 엘리베이터 복도를 조금 걸어나가 좌우 복도를 살폈다. 복도에는 아무 것도 없었지만 어쩐지 으스스한 기분이 들어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도로 타고 내려왔다. 저 아이가 10층에 살고 있는 것은 우연일까.

 

아이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서 상가 건물들을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아이가 나보다는 먼저 이곳에 살았고 – 이 구린 아파트에는 나를 제외하고는 새로운 입주민이 별로 없으니까 아마 어릴 때부터 살지 않았을까 – 이곳을 잘 알 텐데, 마치 새로운 곳에 온 이방인처럼 낯설어 보였다. 로마에 처음 놀러 갔던 나의 뒷태가 저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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