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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서적 리뷰

Into the Book: "니체 인생론 에세이 - 세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by 북노마드 2020.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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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니체를 읽고 리뷰한다는 것...

사실 니체의 책을 읽고 리뷰를 쓴다는 것은 솔직히 부담스런 일입니다. 최소한 한국 사회에서는 말입니다 - 다른 나라는 안 살아봐서 모르겠습니다만. "니체", 그리고 그가 말한 "신은 죽었다"만큼이나 한국인에게 친숙한, 그래서 너무나 상투적인 말이 있을까 싶습니다. 원래 철학이라는 것에 관심은 있었지만, 영역이 영역인지라, 접근이 쉽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도 고전을 조금 읽어보겠다는 심산으로 몇 년 전에 그 유명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샀는데, 역시나 초반부에서 꼬꾸라졌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비유로 이루어져서 이게 내가 책을 제대로 읽어내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어서 접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년초에 모임 한 분의 추천으로 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책이 좋았던 것은 책 제목에서 이미 읽히겠지만, 니체 본인이 생각하는 것을 직설적으로 - 차라투스트라에서와는 몹시 다르게 - 소주제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각 주제별로 2~3페이지에 걸쳐서 이야기를 해서 호흡도 짧고 이해하기가 쉬웠습니다. 애초에 이런 책으로 니체를 접했다면, 더 쉽게 니체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 본 책이었습니다.

고전의 세계로 초대하는 많은 안내서에서 입문서로 시작하라고 안내하는데, 그 논리로 따지면 이 책이 어쩌면 니체 철학의 입문서쯤으로 봐도 무방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기존에 사 두었던 니체의 "차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 "도덕의 계보학"을 읽어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크게 7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 어떻게 살 것인가, 둘째, 영혼은 왜 단련되어야 하는가, 셋째, 세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넷째, 신은 왜 죽었는가, 다섯째, 무엇이 진리인가, 여섯째, 내가 사랑한 것들, 일곱째, 잠언론 이렇게 말입니다.

처음 두개의 장을 읽어내면서는 어떤 느낌이었냐면 마치 팀페이스의 "타이탄의 도구들"과 같은 자.기. 계.발.서.를 읽는 감.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장이 넘어갈수록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종교적 색채가 강해지면서 - 그니까 왜 그 유명한 신은 죽었다라는 말이 나왔는지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 사실 기독교적 믿음이 강하신 분들에게는 상당히 반감이 생길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물론 어떻게 받아들이실지는 저도 모르는 영역이지만, 글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나는 쓸데 없는 혀놀림에 현혹되지 않겠다는 분께서는 여기서 읽기를 중단하셔도 무방합니다^^

 

1. 자기 계발서를 읽어내는 느낌이란 것...

- 이 말은 곧 내가 독일인인 것은 내가 여러 나라 중에서 독일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독일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독일인이 된 것과 같다. 그것은 내가 골라서 선택하기 이전에 이미 그렇게 선택하도록 된 것이지, 나의 신념이나 확신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것은 마치 포도주 생산지에서 태어난 사람이 어려서부터 포도주를 마실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포도주 애호가가 되는 것과 같다.  p.36

- 그러면 자신의 현재 생활은 신념이나 확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아무 근거도 없는 원칙에 익숙해진 채 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p.37

 우리가 한국인인 것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부모가 누군지 또한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소맥이 좋아라고 생각하는 것도 실은 그런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결국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저희 아버지는 저를 앉혀놓고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꼭 서울대에 가야 한다. 우리 같은 집안이 일어나는 것은 그것밖에 없어."

이 말을 저는 정말 넌저리나게 들었습니다. 이런 말을 계속 들으니 일종의 반항심이 생겨났습니다. 난 절대 서울대에 안 갈거야, 라는. 지극히 내성적이었던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란이었습니다. 소리없는 반란이었지만 말입니다. 결국 저는 서울대에 안, 아니 못 갔습니다만. 지금에서야 생각을 해 봅니다. 만약 그때 제 부모가 하버드를 가라고 했다면 어땠을까라는. 그러면 서울대라도 가지 않았을까 라는. 그리고 만약 그때 우리 같은 집안, 이라는 말을 안 쓰셨다면 나는 어렸을 적 우리 집안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라는. 꽤 오랫동안 저는 저희 집안이 힘들게 살아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렇게 정의했습니까? 네, 맞습니다. 우리 부모가 스스로 그렇게 정의했고, 그걸 받아들인 것도 제 스스로입니다. 주어진 환경을 바꿀 수는 없지만, 앞으로의 환경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에이, 나는 직장도 똑같고, 집도 똑같은데? 하시는 분들은 그렇다면 생각, 마인드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늘 미래의 행복만을 바라보고 현재를 불행하게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이미 주어진 환경에 감사하고, 지금 행복한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그 마음가짐의 선택은 본인이 지금 당장 하실 수 있습니다.

- 사람은 모두 평등을 지향하는 버릇이 있다. 나도 사람이고 너도 사람인데, 혹은 나와 너는 같은 나이인데, 똑같은 처지에 있었는데, 왜 너는 그런 행운을 얻고, 나는 왜 이런 불운을 겪는지 알 수 없다고 한탄한다. 하지만 그런 행운과 불운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타인의 불행에 기뻐하는 심리 상태에 자연히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p.42

남들은 비트코인에 투자해서 대박나서 퇴사하고 그러는데, 왜 나는? 남들은 이직도 잘 되던데, 왜 나는 이X의 상사와? 생각하고 계신가요? 그러면 아무 발전이 없습니다. 그냥 지금부터라도 투자 공부를 시작해 보시면 됩니다. 아, 내가 아직 때가 안 되어서, 공부가 부족해서 그렇구나, 라고 생각을 바꿔보시면, 타인의 행운이라는 것이 곧 나에게도 올 것이라고 생각하면, 타인의 행운도 기꺼이 기뻐해 주고 축하해 줄 수 있을 겁니다.

- 우리는 강하고 선량한 사람을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을 식견이 좁고 노예 본능이 습관처럼 굳어져 버린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중략) 한마디로 이미 검증된 일만 실행하는 사람은 그 일을 하는 데 자신감도 붙고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그 일을 강하게 밀어붙일 수가 있기 때문에 강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여러 가지 행동의 가능성이나 방향에 대해 경험과 지식이 결핍되어 있고 식견이 좁은 데다가, 유연성이 없고 자유로운 결단도 어려울 뿐이다. 당현히 선택의 폭도 무척 좁다.      p.72

강하게 밀어붙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미 본인이 그 방향으로 성공을 해 봤기 때문에 자신이 있다는 말일 겁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역으로 새로운 시도를 피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도 직장에서 일을 하면서 새로운 시도를 해 보는 것을 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공할 수 있을까, 두렵기 때문에 그래도 안정된 방향으로 업무를 추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도박을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확실히 성공이 보장되지 않더라도 끊임없이 배우면서, 새로운 방향으로 일을 시도해 본다면 어제보다 다른 나, 성장하는 내가 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는 대목이었습니다.

- 고귀한 사람도 소위 착하다는 사람들에게는 방해가 된다. 착하기만 한 사람들은 낡은 것을 원하고 낡은 것이 보존되기를 바라지만, 고귀한 사람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새로운 미덕을 드러내려 하기 때문이다. (중략) 그러나 나의 사랑과 희망을 걸고 호소한다. 당신의 영혼 속에 있는 영웅을 포기하지 말라! 당신의 드높은 희망을 성스럽게 떠받들라! p.100~101

- 우리는 모두 고독으로 돌아가야 한다. 사람들은 권력자들의 외침에 귀가 멀고, 소인배들의 가시에 찔리고 있다. p.102

- 예로부터 시장과 명성으로부터 동떨어진 곳에서 위대한 것이 탄생했으며, 진리가 발견되었다. 그러므로 고독으로 돌아가라. 시장에서는 똥파리들에게 시달릴 뿐이다. 거센 바람이 사정없이 부는 곳으로 가라.   p.104

고독의 힘, 혼자 있는 시간의 힘에 대한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디지털 미니멀리즘, 즉 SNS 등 세상의 혼란으로부터 자신을 끊어내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 같습니다. 오롯이 혼자 있어본 적이 언제였습니까? 저도 잘 못 하고 있지만, 아침형 인간을 하면서 가장 좋은 것은 새벽시간대는 그 누구도 저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롯이 제가 하고 싶은 일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에 매일의 자신에게 할당해야 합니다. 여러분 안의 영웅은 어쩌면 그 고요과 고독 속에서만 모습을 보여줄지도 모를 일입니다.

- 타인과 사귀는 것은 자신의 개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개성이 없는 사람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어떤 사람은 자신을 얻으려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을 잃기 위해 이웃과 사귄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그릇된 사랑 때문에 스스로 고독의 포로가 된다.   p.111

- 이미 완성된 세계를 내면에 지니고 있는 친구, 선을 품고 있는 친구를 사귀라. 또한 언제나 창조하는 친구를 사귀라. p.112

개인적으로 "끼리끼리 논다"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사회적 동물이고, 이웃과 친구와 사귀고 어울릴 수밖에 없습니다. 굳이 사회적 관계를 잘 다져가는 사람이 장수하더라는 의학적 결과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인간관계는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영역입니다. 니체가 언급한 극단적(?)인 관계에 대해 100% 동감하고, 실천하는 것은 힘들겠지만, 부자라 되려면 부자를 만나라는 말을 듣고는 밖.에.서. 부자만 찾아다니지 말고, 일단 본인이 먼저 완성된 세계를 품는 사람이 되려고, 늘 창조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 봤습니다.

 

2. 불편하지만, 그리스도교를 해부한다는 것...

- 일요일 아침 교회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이런 의문을 품고는 했다. 2천년 전에 하느님의 아들로 자청하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한 유대청년 예수의 사건이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고 추앙되고 있다니!   p.179

- 유대교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스라엘의 역사까지도 하느님의 역사로 바꾸어 버렸다. (중략) 그들은 비를 내려주는 자연의 신 야훼(여호와)와 이스라엘의 역사를 자신들의 지배욕구 의지에 의해 신격화함으로써 신의 뜻을 만들어 냈다. (중략) 모든 것을 신의 뜻에 복종했느냐 안 했느냐에 따라 단순화시켜 버린 것이다. (중략) 신의 뜻이란 유대사회를 이끄는 종교지도자들의 권력의지, 바로 그것이었다. (중략) (종교지도자에 대한) 굴종은 곧 (신의) 구원이었다. 이리하여 죄는 종교권력의 무기가 되고 말았다.  p.186~187

그리스도교를 관통하는 교리는 결국 세속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고 니체는 해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일요일 아침이라는 표현에서 빵 터져 버렸습니다. 니체가 1844년에 태어나 1900년에 생을 마감했으니, 그가 세상을 떠난지도 100년이 훨씬 넘는 지금이라고 사실 무엇이 바뀌었는지 - 정말 개인적으로 - 의심스러워서 말입니다.

- 예수는 사회의 부패와 퇴폐가 아니라 종교적 특권 계급에게 반항했고, 당시 신학자들과 사제들의 권력을 부정한 것이다. (중략) 세상 사람들은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죽었다고 주장하지만, 나는 그가 인류를 대신해서 속죄하기 위해 죽었다는 증거를 아무 데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p.188

- 만일 예수가 인도사람이었다면 수론파였을 것이고, 중국이었다면 노자를 따랐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별 차이를 느낄 수 없는 인물이었다. 조금 느슨하게 표현하면 예수는 자유주의자였다. (중략) 예수가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내면적인 빛, 내면적인 행복, 자기긍정, 그리고 순수한 힘 뿐이었다.  p.197~198

아주 빼어나고 명민하고 훨친한 젊은 이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기존 권력층의 뿌리 깊은 신념과 그들의 폭력적인 굴종 강요가 못내 싫었습니다. 그래서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정치적으로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가 바로 니체가 말하는 예수의 본모습입니다. 정말 요새로 따지면 젊은 시절의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정도가 될 겁니다. 저는 이 구절을 보면서 어쩐지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가 떠올랐습니다.

- 그는 존경할 만한 아버지와 그 밖에 여러 스승들 즉 지혜로운 바라문들이 자기에게 그들이 갖고 있는 최고의 지혜를 대부분 전달하였으며, 그들의 풍부한 지식을 자기가 기대하고 있는 그릇 속에 어쩌면 이미 다 부어넣었는데, 그 그릇은 가득 차지 않았고, 정신은 만족을 얻지 못하였으며, 영혼은 안정을 얻지 못하고, 마음은 진정되어 있지 않는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하였다.    - 싯타르타 (민음사)  p14~15

저도 부처의 일생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사실 저는 부처가 어린 시절 주위의 방탕한 생활이 역겨워서 뛰쳐나왔고 그리고 해탈을 얻었으리라 막연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은 - 물론 이건 헤세의 상상력인지는 모르겠습니만 - 이미 고매한 아버지와 스승들이 있었습니다. 젊은 선각자의 이미지가 예수와 부처는 많이 닮아 있는 듯 싶습니다.

- 초대 교회는 들판의 설교자 예수를 공격하는 광신적 이단자들과 유대교 지도자들에 대항하여 그들과 논쟁하고 그들의 악의를 격파할 인물이 필요했다. 따라서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자신들에게 알맞은 신을 만들어낸 것이다. p.195

- 예수를 '인격자인 신'이라든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든가, '삼위일체의 하느님'이라고 하는 비그리스도적인 호칭들은 미숙한 종교적 장치이며, 한마디로 사람들의 눈 앞에 주먹을 내미는 것처럼 폭력적인 것이다. p.202

- 사도 바울로는 예수를 자신의 십자가에 또 한 번 못 박았다.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과 죽음, 복음의 진정한 뜻과 권위마저도 증오에 찬 위조지폐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바울로가 성서를 통해 시도했던 것은 권력이었다. 다른 종교의 지도자들처럼 종교 권력을 통해서 백성들을 압도하고 힘을 조직화하는 데 교리를 상징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p.205

- 만일 그리스도교가 '기도하지 말라'는 교리를 가르쳤다면 신도들은 권태를 느낀 나머지 다른 종교로 모두 개종하지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라'고 가르쳐왔다. 그것은 기도를 오락의 대용품 정도로 여긴다는 뜻이다. 만일 그리스도료에 '기도하라'는 말이 없었다면, '육체노동'을 스스로 포기한 불행한 성직자들이 할 일이 도대체 무엇이며, 성자들은 또 무슨 할 일이 있겠는가?  p.222

스스로를 날라리 크리스찬이라고 정의하는 저입니다. 10여년 전에 삶이 고단하여 정말 열심히 다니다가 그 고난이 해결이 되니 - 참 간사하지 않습니까?^^ - 발길이 뜸해졌습니다. 그래도 가끔 교회에 가는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20년 새해결심 중 하나가 독실한 크리스찬이 되는 것이라 한달전부터 교회를 다시 열심히 다니고 있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간 교회는 여전했습니다. 기도하라,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다, 우리는 원죄를 가지고 있다, 참회하라, 천국의 문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과학이 엄청나게 발단된 이 시기에 조금 머리(=이성)를 써서 교리에 의문을 표하면 믿음이 부족한 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힐난합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려면 의심하지 말고, 믿음이 있어야 하며,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10여년 전과 바뀐 게 없었습니다. 다들 성경을 스마트폰으로 본다는 것 빼고는 말입니다.

-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이 기대하거나 상상하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그곳은 내일도 어제도 없고 천년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마음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경험에 불과하다. 그래서 천국은 어디에나 있을 수도 있고 아무 곳에도 없을 수도 있다.  p.203

- 세상은 지상의 삶보다 천상의 삶이 더 가치가 있다고 설교하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세상에 심한 해독을 끼친다. 그들이 외치는 '영원한 삶'으로 그들은 이 세상에서 추방할 수 있다면!  p.223

만약 영원한 삶을 보장하는 천국에 여러분이 갔다고 합시다. 그곳에 무엇이 있을까요? 그토록 원하던 람보르기니가 천국에서 당신을 기디라고 있을까요? 코로나19 같은 바이러스 따위는 없는 즉, 질병 하나 없는 무병장수의 삶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까요? 만약에 그렇다고 하면 저는 정말 따분할 것 같습니다. 뻔한 논리지만 어둠이 있기에 우리는 빛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세를 바라본다는 것은 지금 이 생을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의 삶이 너무 고달파서 도망가고 싶은 사람들, 어디서라도 희망의 빛을 붙잡고 싶은 사람들이 종교에 쉬이 귀의하는 것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니체는 그런 현실 회피를 극도로 증오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책이 다분히 자.기. 계.발.서.적이라고 말했는지도 모릅니다. 자기 계발서는 현실을 잘 살기 위한 많은 지침들이 담겨 있지, 어떤 자기 계발서에서도 내세의 행복을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0. '신은 죽었다'는 것...

- 니체는 근대 유럽의 정신적 위기는 유럽 문명의 근간을 이루고 있던 그리스도교적 신의 죽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다. 신의 죽음이란 유럽의 전통적 가치관의 붕괴를 의미한다. (중략) 따라서 그는 '신은 죽었다'고 단정함으로써 발생한 사상과 가치관의 공백 상태를 새로운 가치관의 창조로 치유하려고 노력했다. (중략) 그는 삶 자체가 권력에의 의지, 즉 성장과 지속의 본능과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p.25~26

책 초반의 '니체의 생애와 사상'(옮긴이 이동진)에 언급된 부분입니다. 저의 짧은 소견으로는 니체는 신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교라는 교리가 권력과 결합하면서 만들어낸 역사를 해부하면서, 인간 개인의 주체적 삶에 더 무게를 두었다고 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저의 해석입니다. 니체에 대해서 깊이 있는 지식을 갖추신 분들께 행여나 폐가 가지 않을까 두렵지만, 모든 책은 그 당시, 그 시점에 읽었던 감.각.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이것도 몇 년이 지나 다시 읽으면 다른 생각으로 읽혀질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고전이 가진 매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참,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를 쓰고 나서 본인이 쓰고나서도 너무 시적이고 추상적인 표현이 마음에 안 들어서 자신의 사상을 보다 구체적인 논문으로 해석해서 쓴 책이 있다고 합니다. "선악의 피안"이라고. 근데 찾아보니 2000년도에 나온 책이 가장 최근 책이고, 그마저도 절판이 되었네요. 일부 중고서점에서 파는 것도 같지만 말입니다. 차라투스트라를 다시 읽기 전에 징검다리로 읽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만, 역시나 요새는 저 또한 돈에 꽂혀 있는지라. 그런 의미에서 - 스스로 경계하는 차원에서 - 니체가 이 책에서 세상의 부자들에게 외치는 말을 인용하며, 긴 글을 맺을까 합니다.

- 너에게는 돈벌이가 가장 쉬운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는 세상에서 결코 진정한 기쁨이 될 수 없는 것들만 수집하는 데 골몰했다. 그리고 너는 돈이란 벌기보다는 관리하고 보존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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