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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 에세이

겨울산은 봄과 겨울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by 북노마드 2019.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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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산은 봄과 겨울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겨울산에 들어왔다. 주중에 첫눈이 내리고, 내내 영하의 날씨를 유지해서인지 산길 바닥엔 살얼음이 많았다.

정상을 향해 갈수록 산길 바닥엔 점점 얼음으로 뒤덮여갔다. 채 녹지 않아 그대로 얼어붙어 버린 바닥을 살금살금 걸어 올라갔다. 꽤나 미끄러워 중간에 돌아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중간에 목표(=정상)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앞서 가는 아저씨의 등산화를 문득 바라봤다. 등산화가 생각보다 조그마했다. 그 앞 일행들의 등산화도 마찬가지로 발크기에 딱 맞는 듯한 슬림형이었다. 내 등산화를 바라보니 혼자 육중했다. 무려 12년을 나와 함께 했던 녀석이다. 이 녀석을 닿지도 않는단 말이야.

정상으로 가까이 할수록 길은 험난했다. 한 아주머니가 거의 바닥에 앉다시피 하면서 조심조심 내려왔다.

'너무 조심스러워 한단 말이야.'

아이젠이 없이도 겨울 산에서 거의 미끄러져 본 적이 없는 나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마치 괜스런 호들갑을 떠는 것처럼 보였다. 앞에 가는 아저씨가 술에 취한 듯 계속 비틀거리더니, 이내 뒤뚱거리면서 뒤로 넘어지듯이 내 쪽으로 왔다. 나 또한 미끄런 얼음 위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순간 나를 바라보며 손을 내미는 듯 했다. 순간 그 손을 잡아줄까 고민했지만, 나 또한 얼음 위에 몸을 버티고 있는지라 내 손길이 그렇게 힘이 될 것 같지 않았다. 다행히도 험난한 내리막길이 아니라 아저씨는 이내 균형을 잡았다.

'아... 이렇게 앞에서 넘어지면 도미노처럼 다같이 다쳐버릴텐데...'

나도 모르게 약간 부아가 났다. 그 때부터는 앞 일행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큰 일 없이 정상에 도착했다. 막상 정상에 도착해 보니, 내려가는게 약간은 걱정이었지만, 미끄러져 본 적이 없던 터라 알지 못할 자신감이 있었다.

근데 이게 왠걸. 정상에서 채 20미터도 내려가지 못해 한바탕 미끄러졌다. 완전히 뒤로 넘어지기 전에 왼손을 짚고, 오른쪽 무릎으로 버텨내서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다.(*이 뛰어난 운동신경이란...) 앞서 내려가시던 할아버지가 흘끗 돌아보신다. 아마 도미노 생각을 하셨으리라. 나는 애써 태연한 척 하며 다시 길을 재촉했다. 근데 10초도 되지 않아 다시 넘어질 뻔 했다. 역시 이번에도 같은 동작으로 버텨냈다. 오른쪽 무릎이 욱신거렸다. 할아버지가 이번에는 뒤를 돌아보시고는 "조심해!" 한마디를 내뱉으시면서 너털웃음을 지으셨다. 존심이 약간 상했지만, 지금 그럴 때가 아니었다.

두번을 넘어질 뻔 하니, 덜컹 겁이 나기 시작했다. 12년을 함께 한 등산화도 외관은 멀쩡해 보였지만, 아마 바닥은 닳고 닳았으리라. 모르긴 몰라도 나의 균형 감각도 닳고 닳아 자만하면 안 되겠구나 싶었다. 앞서 내려가시던 할아버지는 아이젠을 차고, 지팡이를 짚으면서 쉽게 내리막길을 재촉했다. 그때부터 로프를 잡으며 말그대로 엉.금.엉.금. 내려오기 시작했다.

'지팡이, 로프에 의지하지 않고는 이제 나도 어찌할 수 없는 나이가 된 건가.'

순간 서글픔이 밀려왔다. 그 서글픈 엉금엉금을 계속 하면서 내려오자, 저기 계단 아래에 한 커플이 있다. 여자친구는 바닥에 앉아 있고, 남자친구는 서 있었다. 올라오고 있는 길인지, 내려가고 있던 길이었는지는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내가 엉금엉금 내려가자, 답답하셨는지 어떤 아저씨가 나를 제치고 내려간다. 그러다 그 여자친구가 앉아 있던 자리 바로 앞에서 크게 넘어지신다. 그 모습을 본 남자친구가 재빨리 말한다.

"괜찮으세요? 여기 조심하셔야 해요. 여기 정말 미끄러워요. 흙이라도 뿌려놔야 될까 봐요."

나는 사실 그 말에 적잖이 놀랐다. 아까부터 나는 도미노 생각을 하지 않았나, 지팡이를 가지고 올 걸 이라고 내 안위를 걱정하기만 했지 다른 사람의 넘어짐을 걱정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남자친구는 여자친구를 힘껏 보호하고 있었다.

'사랑에 빠지면 남자는 저리 슬기로워지는걸까? 아니면 애초에 슬기로워서 사랑에 빠질 수 있었을까?'

(*사실을 말하자면 지나면서 보니까 훈남이다)

넘어진 아저씨가 그렇지 하면서 옆에 있는 흙더미를 파헤쳐서 넘어진 바로 그 곳에 흙을 덮는다. 덮흙이라고 해야 하나?

잠시 감상에 잠겼지만, 그래도 엉금엉금 길을 재촉했다. 한참 내려왔다가 또 한번 넘어질 뻔 했다. 욕이 나올 뻔 했지만, 나도 그 곳에 덮흙이라는 걸 해 봤다.

산 중턱에 도착하자, 이제 미끄러운 얼음은 거의 없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저기 공터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산 중턱의 양지바른 바로 그 곳은 봄이었다.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곳에서 사람들은 저 아랫 세상에서 가져온 온기어린 커피와 뜨근한 라면 국물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무사히 겨울산을 빠져 나왔다. 잠시 뒤를 돌아 산을 바라보았다.

겨울산은 봄과 겨울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겨울산의 초입은 태평하다. 산 정상의 수많은 넘어짐과 비명을 산기슭은 모른다. 새로운 등산객들이 해맑은 표정으로 산기슭에 들어선다. 그들의 미래에 무슨 일이 펼쳐질지 전혀 모른채.

이제 나이가 들어서인지, 내 신체도 닳고 닳기 시작했다. 이제는 인생의 얼음판을 혼자서는 걸을 수가 없다. 로프에, 그리고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누군가에게 내 인생의 로프가, 내 인생의 지팡이가 되어 주세요, 라고 말하는 장면을 상상해 봤다. 평생 자기 안위만 챙기던 사람이 갑자기 도움을 청한다면 과연 사람들은 그 사람의 로프가, 지팡이가 되어줄까?

평상시에 인생의 덮흙을 많이 해 본 사람에게만 사람들은 기꺼이 로프가, 지팡이가 되어 줄 것이다. 

불교로 따지면 이게 인과응보이고, 기독교로 따지면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일게다. 바로 옆에 있는데 오른손이 모를 수가 없다. 단지 모른척 할 뿐일게다. 많은 덮흙을 한 왼손이라면 오른손은 언제라도 손을 내밀어 왼손의 로프가, 지팡이가 되어줄 것이다.

나는 지금 덮흙을 많이 하고 있는가, 문득 자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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