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명은 아니지만, 그때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올바른지 판단할 여유가 없었다. 그때 나는 나무토막을 붙들고 물이 흐르는 대로 떠내려갈 뿐이었다. 주위는 칠흑같이 어둡고 하늘에는 별도 달도 없었다. 죽어라 나무토막을 붙들고 있는 한 익사는 면할 수 있지만, 내가 어디쯤 있고 어디를 향해 가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 기사단장 죽이기. 1권. p.75
# 대체 뭐가 잘못되었을까?너무 오랫동안 생계를 위해 초상화를 그려온 탓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 안에 있던 자연스러운 직관이 힘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해안의 모래가 야금야금 파도에 쓸려가는 것처럼. 어쨌거나 어디선가 흐름이 잘못된 방향으로 꺾여버린 것이다. - 기사단장 죽이기. 1권. p.78~79
# 거의 떨어져 살면서 어쩌다 한번 얼굴을 보는 사이였으니까. 아버지라기보다 가끔 집에 오는 친척 아저씨 같은 존재랄까. 중학교 들어갈 즈음에는 아버지의 존재가 점점 거북해져서 일부러 피해다녔어. 미대에 들어가면서도 의논 한마디 안 했고. 복잡하다고는 못해도, 평범한 가정환경은 아니었지. 대충 무슨 느낌인지 알겠지?”
“대강은.”
“어쨌든 이제 아버지의 과거 기억은 전부 소멸했어. 아니면 어느 깊은 늪 바닥에 가라앉았거나.” - 기사단장 죽이기. 1권. p.99
# 하지만 왠지 몰라도 마사히코에게 그림의 존재를 알리고 싶지 않았다. 이것은 나와 아마다 도모히코 사이의,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일대일의 문제라는 느낌이 들었다. 왜 그런 기묘한 생각을 품게 되었는지는 설명할 길이 없다. 어쨌든 그렇게 느꼈다. - 기사단장 죽이기. 1권. p.107
# 내 호기심은 내가 예절이나 상식을 존경하는 마음보다 훨씬 강렬하고 집요했다. 그것이 화가로서의 직업적인 호기심인지, 단순히 한 인간으로서의 호기심인지는 나도 구별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안에 든 것을 꺼내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누구에게 어떤 비난을 받아도 상관없다고 마음을 굳혔다. 가위를 가져와 단단히 묶인 끈을 잘랐다. 그리고 갈색 포장지를 벗겼다. 필요하면 다시 포장할 수 있도록 조심스레 시간을 들였다. - 기사단장 죽이기. 1권. p.107
# 원래부터 그랬다. 사람들은 갖가지 고민거리를 들고 그를 찾았다. 그러나 그는 그 내용을 자기 속에만 담아둥ㅆ다. 빗물이 물받이를 타고 용수통에 고이는 것처럼. 거기서 다른 데로 나가지는 않는다. 통 밖으로 흘러넘치는 일도 없다. 아마 필요에 따라 적절한 수량을 조절하는 것이리라. - 기사단장 죽이기. 1권. p.375
# 세상에는 듣지 않는 편이 더 좋은 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원히 듣지 않고 버틸 수는 없다. 때가 오면 아무리 단단히 귀를 틀어막아도 소리는 공기를 진동시키며 사람의 마음을 파고든다. 그것을 막기란 불가능하다. 그게 싫다면 진공의 세계로 가는 수밖에 없다. - 기사단장 죽이기. 1권. p.378
# 어쩌면 그 기사단장도(아니, 그 이데아도) 이 그림이 얼마나 훌륭하고 강렬한지 알아보았기에 그림 속 기사단장의 모습을 ‘차용’한 것이리라. 소라게가 되도록 아름답고 튼튼한 조개껍데기를 제 집으로 선택하는 것처럼. - 기사단장 죽이기. 1권. p.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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