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춘식이 형이라고 부르는지는 처음 알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자로 보면 그의 이름은 춘식이다. 하루키라고 하면 어쩐지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지는데, 춘식이라고 하면 동네 바보형 같은 기분이 든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루키라는 작가 자체는 변함이 없는데, 그것을 담는 언어가 바뀌는 것만으로도 동일한 실체에 대한 감각이나 정서가 달라지니 언어의 힘은 역시 어떠한 물질적인 것을 넘어서 있는 것이 확실하다.
내가 사랑하는 그녀.
내가 사랑했던 그녀.
같은 여자를 두고도, 여자라고 부르는지, 여인이라고 부르는지, 소녀라고 부르는지, 그녀라고 부르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대상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물론 그 실체는 변함이 없지만, 그 실체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머릿속에는 아예 다른 존재가 되어 버리니 어쩌면 후자가 더 정확한 실체가 아닐까. 세상이라는 건 본디 우리 각자의 머릿속에서 형성되어 버리는 것이니까.(물론 여기서 이런 철학적인 담론을 논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언어에 대해 말이 나와서 말인데, 오늘도 하루키, 혹은 춘식이 형의 작품을 몇 줄 읽었다.
기사단장 죽이기.
몇 달 전에 들었다가 재미 없어서 도로 접었던 작품이다. 무려 30여년 전부터 하루키, 하루키, 하는 소리를 들어왔는데 언젠가는 내 인생에서 하루키의 작품을 읽어야만 할 것 같은 일종의 강박관념 때문에 골라들긴 했지만, 도저히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초반부터 유부녀와의 바람이야기가 나오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실제로 그런 것이 현실이라고 나보다 5~6살이 많고, 결혼을 한 형이 제발 현실을 똑바로 보라고 조언을 해 줬지만, 평생 바보처럼 산다고 해도 그런 조언 따위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아마 그런 뿌리 깊은 나의 거부감 때문이겠지만).
그리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해변의 카프카를 집어 들었다. 그것도 도서관에서 빌렸다. 읽다가 바닥에 떨어뜨리면 금세라도 반절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낡고 해졌고, 심지어 하권은 투명한 스카치 테이프로 응급 수술까지 했다. 수많은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손, 눈, 뇌, 그리고 입을 거쳤을 것이다. 푸르스름한 책 표지에 하얀 인물의 모습이 어떤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 탓인지, 아니면 이제라도 수많은 사람들의 행렬에 뛰어들어야겠다는 안달감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마 여름 동안 몸이 조금 좋지 않아 미뤄 두었던 정기 휴가를 가을께 사용하면서 제주도에 오르는 여행길이 아니었다면, 나는 여전히 하루키와 데면데면한 관계를 유지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한번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결국 읽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났을지도.
그렇게 생각하면 작년 제주도 여행은 - 개인적으로 몹시 춥고, 그래서 더욱 외로웠고 지겹기까지 했지만 -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를 내 인생에 선물해 준 꽤나 값어치가 나가는 여행이었을지도 모른다. 역시나 인생은 한 면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 셈인가 보다. 이렇듯 곱씹어 보면 인생은 얼마나 다채로운 맛을 자아내는가.
아무튼 해변의 카프카를 시작으로 나의 춘식이 형 외사랑은 시작되었다. 느지막한 나이에 그를 접한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하루키의 소설은 읽으면서 자주 고개를 올려 하늘 또는 천장, 혹은 허공을 올려다 본다. 어떻게 이렇게 글을 쓸 수 있을까, 감탄하는 1초, 혹은 시간을 돌이켜 나의 젊음이 절정에 달해 있던 시기에 하루키를 읽었다면 지금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소설적 상상 1초를 위해. 물론 솔직히 말하면 나의 20대 시절에는 어떻게든 하루키의 소설을 꾸역꾸역 읽었단들 나에게 1밀리의 길이도 영향을 끼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소설을 쓰는 사람들, 아니 정확하게 얘기하면 소설을 읽는 사람들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던 시절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계발서의 환상을 좇고 있었을 때니까. 거울 앞에서 나는 성공한다를 매일 아침 열 번씩 외치면 내 인생에 드라마틱한 일이 일어날 거라고 믿고 있었고, 더 좋은 방법이 없을까, 라는 마음으로 그런 책들만을 좇아다니고 있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래서 성공했냐고? 세상 모든 관념이 상대적인 거이기에 성공이라는 관점도 백인백색이겠지만, 적어도 나의 20대 때 꿈꾸었던 성공의 관점에서 보자면 전혀 성공하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단 한 번도 거울 앞에서 그런 주문을 외워본 적이 없으니까. 정확히 당시의 나는 세상의 모든 자기계발서를 모두 읽어내서 집대성하면 그 누구도 찾지 못한 절대반지를 내가 만들어낼지도 모른다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아무튼 지금이라도 하루키의 책을 만났다는 것을 나는 무엇보다 시의적절했다, 라는 정도로 표현하겠다(*혹은 표현해야겠다, 왜냐면 내가 집대성한 자기계발서의 절대반지는 "긍정적인 사고"였으니까.)
기사단장 죽이기, 를 읽으면서 자주 멈춰서 하늘, 천장, 그리고 허공을 올려다 봤다. 어떻게 보면 나는 오랫동안 글을 써 왔다. 작금에 와서야 어떤 의무감 - 꾸준히 글을 쓰는 행위가 내 인생을 생산적으로 살고 있다는 어떤 증거와 같은 - 같은 게 생기는 했지만, 초기에는 어떤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그저 내 감상을 적절하게 담아냈을 때의 뿌듯함이 좋았다. 사람들이 보든 말든, 그런 글들을 블로그에 남겨 놓는 것. 이게 다였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블로그 글로 어떤 돈을 벌어보고 싶은 욕심으로 눈이 희뿌애진 것은 사실이다.
아무튼 글을 남들보다는 많이 쓴 편이라고 생각(자부까지는 아니고)하는데, 그렇다면 나는 글쓰기가 늘었는가? 그리고 계속 글을 쓰다보면 언젠가는 나도 하루키와 같은 문장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어떤 식의 비유나 어떤 식의 표현법을 가끔 따라해보기도 하지만, 어쩐지 나는 앵무새가 자기의 말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사람의 말을 그저 따라하고 말았을 때 - 아마도 앵무새 스스로가 느낄 법한 - 좌절감 같은 게 뒤따른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글쓰기에 있어서는, 발전이라는 게 없는 것 같다.
이를테면 피아노 연주라고 하면, 시간이 흐르고 꾸준히 연습을 하게 되면, 어찌됐든 시간에 비례하여 - 완벽하게 비례하는 것은 아닐지언정 - 연주실력이 향상된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선도 제대로 긋지 못하는 사람이 특정한 시간을 계속 쏟아붓게 되면 오, 그림 좀 그리는데, 싶은 수준에는 이르게 된다. 물론 만인이 인정하고 입을 오(O)자로 벌릴 수준은 아닐지언정.
그런데 글은 그렇지가 않다. 시간이 더 흐른다고, 계속 글을 썼다고, 글쓰기 실력이 향상하냐,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그건 글쓰기가 밖으로 보이는 활자는 똑같은데, 그 안에 있는 정신적 영역이 더 크게 작용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떤 정신작용이라는 것은 각자의 나이에 제각각 갖춰지는 것 같다. 그러기에 많은 작가들이 20대의 나이에도 세계적인 작품을 남기기도 하고, 노년에 이르러 낸 작품들이 혹평을 받기도 하는 것이 아닐까. 아까도 말했다시피 피아노나 그림은 외적으로 - 손가락 움직이라든지, 그림체라든지 - 발달된 모습이 보이지만, 글은 100년 전이나, 1일 전이나 똑같은 활자체를 가지고 있기에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잠기면 나는 가끔 문을 잠그고 혼자 있고 싶어진다. 물론 나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내가 늘 혼자 있는 것을 알기에 무슨 소리냐고 비웃겠지만, 이건 순수하게 비유적인 표현으로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어찌됐든 어두운 동굴에 홀로 오래 있는다고 해서, 제 스스로 불을 밝히거나,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이상 볕을 볼 수 없는 것처럼, 바뀌는 것은 없다. 그저 더욱 많은 시간을 공을 들여 책을 읽고, 부러워하고, 질투하고, 계속해서 글을 써 나가는 수밖에.
아무튼 글쓰기는 흔한 글쓰기 교육에서 알려주듯이 근육이 붙지 않는다. 글쓰기는 그 자체로 정신적인 것이다. 그러니 오로지 당신의 머릿속에 반짝이는 그 빛을 따라가야 한다. 물론 단 한 번이라도 하루키의 머릿속의 빛을 살짝 엿보고 싶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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