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니 글(책)을 읽고 울어본 적이 없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운 횟수를 꼽자면 무한대로 확장되겠지만.
그런 '나'를 울린 - 펑펑 울기 보다는 (전날 밤 잠을 잘 자지 못해서 눈이 따가워서 그런가 의심이 들 정도로) 눈시울이 뜨거워지거나, 왼쪽 심장이 아리거나 - 글이 있습니다.
김애란 작가님의 산문, <잊기 좋은 이름>
산문의 정의는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고 인생이나 자연 또는 일상생활에서의 느낌이나 체험을 생각나는 대로 쓴 글(*정확히는 수필의 정의)입니다만, 그녀의 산문은 말 그대로 '산'(살아 있는) '문'장들이 가득한 글의 형식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김애란의 문장을 읽으면 수산 시장에서 회 쳐지기 직전 마지막 생을 직감하며 펄떡 뛰는 물고기, 고소한 치킨 냄새를 맡았을 때 입안 가득 차오르는 침샘이 그려집니다.
이 문장, 먹고 싶다, 라는 미친 식욕을 자극하는 책.
이 책은 제 기억이 맞다면 일년 전쯤 지인이 추천해 주셨을 겁니다. 그때 첫 부분을 읽다 말았는데 일 년 남짓 시간이 흐른 뒤에 - 제 다른 지인이 추천해서 - 다시 손에 쥐고 수 차례 울었습니다. (일 년의 세월이 야속하기 보다는 책의 끝이 다가올수록 맛볼 문장들이 닿는 게 아쉬워서)
여기에 포스팅을 했다고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지는 않을 겁니다. 누군가는 일 년 전의 저처럼 초반부를 읽다가 접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아예 관심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 소낙비를 피해 들어간 서점에서 우연히 발치에서 이 책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어? 이 책, 누군가(저로 기억되지 않아도 됩니다^^)가 얘기했던 책 같은데? 휘리릭- 넘겨보다 비가 그쳐 재빨리 빠져나올 수도, 그 자리에서 책 속에 빠져버릴 수도 있을 겁니다.
이런 경험을 김애란 작가가 멋지게 표현합니다.
# 책도 나이를 먹는다. 나도 나이를 먹었다. 그사이 좋은 일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일도 있었다. 김광석의 노래를 바꿔 불러보자면 나는 떠난 사람도, 내가 떠나 보낸 시간도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때론 기쁘게, 때론 무겁게 조우한 문장들이 있었다. 어제는 비가 개서 그런지 날씨가 좋았다. 저녁에 집 앞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오랜만에 신선한 공기를 쐬었다. 순간 나는 ‘내가 아는 공기다’ 중얼대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가 아는 저녁, 내가 아는 계절, 내가 아는 바람. 그러니까 어릴 때 엄마가 밥 먹으라고 하기 전, 늦게까지 밖에서 놀던 날의 날씨. 그러고 보면 시간은 정말 흘러가는 게 아니라 이어지고 포개지는 모양이다. 그렇게 돌아오고 어느 때는 나보다 먼저 앞에 가있다 나를 향해 뚜벅뚜벅 자비심 없는 얼굴로 다가오고 때론 한없이 따뜻한 얼굴로 멀어지기도 하면서. 어쩌면 우리가 읽은 문장 역시 마찬가지일 거다. – <잊기 좋은 이름> 中 여름의 속셈
이제껏 작가란 나와 다른 특출한 감각기관을 한 두 개 더 가지고 태어났거나, 아니면 공감각이라는 걸 한꺼번에 여러 개 할 수 있는(이를 테면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한꺼번에 신속하게 버무릴 수 있는) 별종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김애란 작가의 문장을 밟으면 작가란 나와 같은 감각을 가지고 있지만, 언제라도 내가 느낀 감각, 시간, 기억 속으로 고스란히 나를 데려갈 수 있는 시선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오래 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문장을 읽으면 이런 글은 어떤 사람이 쓸 수 있을까, 묻게 됩니다.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은 사람. 문장에 그녀 냄새, 아니 사람 냄새가 가득합니다.
이 글을 처음 쓸 때는 어떻게든 이 책을 다른 사람에게 읽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그런데 일 년 전 제 시간이 어긋났듯 여러분의 시간도 제각각 다를 겁니다.
언젠가 툭- 여러분의 시간대에 이 글의 문장들이 포개지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시간은 흘러가는 게 아니라 이어지고 포개지니까요.
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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