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는 작가는 진실만을 써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헤밍웨이의 대다수의 작품들은 자신의 실제 경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종군기자 시절의 (극한의) 경험을 통해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무기여 잘 있거라’라는 걸작이 탄생했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헤밍웨이의 상상력이 결여된 작가라고 - 제약된 소재를 돌려 사용하는 – 힐난하기는 합니다만.
어릴 적 – 들으면 호탕하게 웃고 싶으시겠지만 – 배우를 잠시 꿈꿨습니다. 주위에 연기학원은커녕, 그런 꿈을 꾸는 사람조차 찾아 볼 수 없었던 시골에서 자랐던 제게 배우가 되기 위해 조언을 얻을 수 있는 곳은 서점뿐이었습니다. 탤런트 되는 100가지 방법이었나? 제목은 흐릿한데, 개중 아직까지 뇌리에 남아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배우는 술, 담배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는 술, 담배를 하지 못하고서 어떻게 남의 인생을 연기할 수 있겠는가, 뭐 이런 논리였습니다. 그 대목을 읽고 – 당시 중학생이었던 저는 - 배우로서의 꿈을 반쯤 접게 되었습니다만.
직접 경험, 간접 경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헤밍웨이와 같은 작가들은 직접 경험을 중시합니다. 저를 고민에 빠뜨린 것은 그렇다면 판타지나 SF 작가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렴풋하게 제 나름의 정의는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괴수가 나오는 소설이라면 실제로 직접적으로 괴수를 만날 일은 없겠지만, 광견에 - 광견이 아니더라도 그에 비견될 개에게 - 쫓겨 본 경험은 다들 한 번쯤은 있으실 겁니다. 아니면 가까이서 목격을 했거나. 그 때 심장이 반쯤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공포감. 이런 것이 있기에 괴수에게 쫓기는 장면에 우리는 독자로서 몰입할 수 있고, 작가로서는 작품을 쓸 수 있을 겁니다. 반쯤은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런 식의 결론을 내리고 있으면서도 뭔가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모르는 영역에 대해서 제대로 그려낼 수 있을까, 싶은 생각 말입니다. 그래서 나도 전쟁 같은 데 나가보거나(*실제로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못 나갈 것 같지만요), 마약 같은 걸 해 봐야 깊이 있는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내가 멋진 소설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경험이 부족해서다, 이런 식의 생각 말입니다.
그런데 정유정 작가의 “이야기를 이야기하다”를 읽고 – 완벽하지는 아닐지언정 – 하나의 해답을 얻은 것 같습니다.
# 내가 생각하는 작가의 의무는 하나다.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것. 작가는 대중의 감정을 파고드는 존재다. 인간은 정서의 동물이며 모든 행동의 바탕에는 어떤 정서, 즉 감정이 자리 잡고 있다. 생각은 변할 수 있고, 설득당하거나 논파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감정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생각이 바뀌어도 밑바닥에 깔긴 감정은 지속적이다.
예를 들어, 친구와 싸운 후를 생각해보자. 누구의 잘못이든 친구와 관계를 지속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나는 화해를 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화해한 후에도, 무의식에 깔린 감정은 쉬 사라지지 않는다. 먼저 화해를 청하지 않는 친구에 대한 서운함,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다는 억울함, 왜 내가 먼저 화해를 청해야 하는지에 대한 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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