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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서적 리뷰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2편

by 북노마드 2022.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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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전에 읽은 소설을 다시 펼쳐지면 놀란다.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게 거의 없다. 소설 속의 어떤 사건은 명확하게 기억이 나는 반면 어떤 사건은 금시초문처럼 느껴진다. 모든 기억은 과거를 편집한다. 뇌는 한 번 경험한 것은 그 어떤 것도 잊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어딘가 깊숙한 곳에 처박앞두어서 찾을 수 없게 될 뿐. - 여행의 이유 p.71

- 독서리뷰를 꾸역꾸역 남기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내가 읽은 책들은 좀처럼 내 머릿속에 남지 않기 때문이다. 너무나 쉽게 날아가버린다고나 할까.


# 작가의 뇌는 들고 다니기 어렵지 않지만, 그 뇌를 작동시키는 소프트웨어는 모국어로 짜여 있다. 작가는 모국어에 묶인다. 프랑스 작가 그 클레지오가 ‘나의 조국은 모국어’라고 말한 것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중략) 언어가 창작의 연료라는, 그 연료에는 등급이 있다. 나의 동료 작가들을 만나는 일이 언제나 즐거운 것은 그들이 동시대 최고 수준의 언어로 독특한 화제들을 진부하지 않은 방식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중략) 작가는 우렁찬 목소리보다는 작은 속삭임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 여행의 이유 p.78~79



- 내 주위의 사람들에게 나는 동시대 최고 수준의 언어로 말하고 싶다. 아무리 노력해도 닿지 못할 영역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러고 싶다. 내 주위 또한 그런 사람들을 가득 채우고 싶지만, 그러려면 많은 사람을 잃어 결국 혼자 남을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이건 주위 사람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그런 수준을 구사하는 사람이 희귀하다는 의미이다).


# ‘여행에서 영감을 얻으시나요?’라는 질문은 작가라면 한번쯤 받아보는 것이다. 여행에서 영감을 얻은 기억이 나는 거의 없다. 영감이라는 게 있다면 언제나 나의 모국어로, 주로 집에 누워 있을 때 왔다. (중략) 영감을 얻기 위해서 혹은 글을 쓰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지는 않는다. 여행은 오히려 그것들과 벌어지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격렬한 운동으로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을 때 마침내 정신에 편안함이 찾아오듯, 잡념이 사라지는 곳, 모국어가 들이지 않는 땅에서 때로 평화를 느낀다. - 여행의 이유 p.79~80

- 이 부분에서는 김영하 작가의 생각에 반대한다. 애초에 에세이라는 속성상 반대라는 명제가 성립하지 않을 테지만, 나의 경우에는 책에 - 책으로 쓰여진 이상 어느 정도 권위가 있다고 믿는 경향이 강해서 - 대해 동의하는 편이다. 나는 되레 여행을 갔을 때 많은 글을 썼다. 물론 그 여행들이 대다수 혼자 출발한 것이라, 여행 도중에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는 기회를 우연않고도 운명적으로 얻지 않는 이상 혼자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 생각들은 대개는 글이라는 형태로 쏟아져 나온다.
물론 소설이라는 걸 써 보겠다고 결심하고 몇 번은 카페에 가서 편안한 음악을 들으면서 글을 써 봐야겠다고 결심했지만 - 어쩐지 그런 환경이라면 집에서와는 별다른 영감이 떠오를 것만 같은 생각에 - 결국에는 간단한 감상용 정도의 글을 쓸 수 있었지만, 집에 있을 때보다 글을 쓸 수가 없었다. 그건 아마 수많은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모국어의 잡음 속에서는 나만의 온전한 모국어가 튀어 나올 겨를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이 모든 것을 경험하는 나라는 주체가 있지만, 그 주체를 초월하는 생생한 현재가 바로 눈앞에 있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련,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은 원경으로 물러난다. 범속한 인간이 초월을 경험하는 순간이다. 자아가 지워지고 현재가 그 어느 때보다 커다란 의미로 육박해오는 이러한 초월의 경험은 시간이 충분히 흐른 뒤에야 언어로 기술할 수 있다. 언어로 옮겨진 후에야 비로소 그것은 ‘생각’이 되어 유통된다. 유통되지 않고 재고로 남은 기억은 창고 깊숙한 곳에 묻혀 잊혀진다. - 여행의 이유 p.81




- 멋진 말이다. 책을 읽을 때, 또는 책을 다 읽고 났을 때, 어떤 책들은 뚜렷하게 감상문을 남길 수 있는가 하면, 어떤 책들은 벅차 오라는 감정과는 달리 어쩐지 언어로 기술하기가 어려울 때가 있다. 이럴 때는 누군가 내 뇌 속에 들어와 현미경으로 내 뇌를 그대로 들어다 봐 줬으면 하는데, 그게 안 되니 답답할 수밖에 없다. 김영하 작가가 말하는 ‘원경으로 물러난다’라는 말이 딱 그때일 것이다. 그러나 얼마큼, 얼마나 오래 원경으로 물러나 있어야 글로 옮겨질 수 있을지는 글을 쓰려고 하는 당사자도 알지 못한다. 그런데 그런 글을 한 번 써 보는 경험을 하게 되면 - 역사나 언어로 기술하기 어려울 정도로 - 황홀함을 느끼게 된다.


# 내 발로 다녀온 여행은 생생하고 강렬하지만 미처 정리되지 않은 이상으로만 남곤 한다. 일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모호한 감정이 소설 속 심리 묘사를 통해 명확해진다, 우리의 여행 경험도 타자의 시각과 언어를 통해 좀더 명료합니다. 세계는 엄연히 저기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세계와 우리 사이에는 그것을 매개할 언어가 필요하다. 내가 내 발로 한 여행만을 진짜 여행이 아닌 이유다. - 여행의 이유 p.117


# 일단 누군가를 신뢰하시고 마음먹으면 우리의 정신 속으로 평안함뿐 아니라 자극과 흥분이 파고들어옵니다. 신뢰란 다른 생명체와 맺어진 관계 가운데 가장 큰 기쁨을 준다. (…)
신뢰란 죽음만큼이나 동기를 짐작할 수 없는 어떤 인물에게 의지하게 만드는 힘이다. 낯선 이를 신뢰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 - 알폰소 링기스, “길 위에서 만나는 신뢰의 즐거움”

- “이제 갈 때가 되었소.”
그는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나는 남은 가족들의 품을 떠났다.

훗날 알고 봤더니 그날 내가 본 그는 - 이승의 사람들의 입에는 - 저승사자로 불리는 자였다. 그의 용모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저승사자는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나에게는 외려 - 내 자신이 그려놓은 - 예수의 모습과 빼닮았었다. 그의 온화한 미소, 그가 내밀던 따스한 손길 (실제로 만져보고 전에도 따듯한 손임이 짐작이 갈 정도였다), 그가 말투는 그를 처음 본 그 누구라도 그의 말을 믿고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편하게 이 세상을 떠났다.

신뢰라는 것은 한 순간에 빚어지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그려놓은 세상의 편견과는 달리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은 절대자를 신뢰하며 평안하게 큰 기쁨 속에서 삶을 마감하는지도 모른다.


# 이런 환대는 어떻게 갚아야 할까. 언젠가 읽은 여행기에서 나는 답을 발견했다. 저자는 북유럽을 여행하던 중에 버스를 타게 되었는데, 그제야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당황하는 그녀 대신 현지인 할머니가 버스요금을 내주었다. 나중에 갚겠다고 하자 할머니는 고개를 적으며, 자기에게 갚을 필요 없다, 나중에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발견하면 그 사람에게 갚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환대는 이렇게 순환하면서 세상을 좀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그럴 때 진정한 가치가 있다. 준 만큼 받는 관계보다 누군가에게 준 것이 돌고 돌아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세상이 더 살만한 세상이 아닐까. 이런 환대의 순환을 가장 잘 경험할 수 있는 게 여행이다. - 여행의 이유 p.146~147

- 내가 읽은 첫 번째 자기계발서는 인간관계에 대한 책이었다. 당시 나는 대학 수능을 막 끝내고, 50여명의 학생들을 키 순이든, 이름 순이든, 성적 순으로든 1번부터 50번까지 나열하게 설계된 네모난 울타리를 벗어나 처음으로 독립적인 성인으로서 인간관계를 맺는 걸 눈 앞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그 책은 직장인을 대상으로 쓰여진 책이었다. 이른바 직장에서 살아남는 '처세술'이었다. 당시의 나는 책은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한 치의 의심없이 믿고 있었다. 거기에 나온 법칙들을 노트에 옮겨 적고, 달달 외우면서 머릿속으로 이런 저런 시뮬레이션을 돌려 봤다.

그 책에서 첫 번째로 나온 인간관계의 법칙은 give and take였다. 얻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그만큼 줘야 한다. 꽤 긴 시간이 흘렸지만, 아니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또렷히 그 법칙은 비즈니스에 국한하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들어맞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사랑 또한 give and take의 형식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상대에게 일종의 부채감을 주는 사람은 결국 사랑을 쟁취한다. 나는 너를 사랑해, 와 같은 온갖 달콤한 말과 선물 공세, 그리고 그에게 온 정신을 쏟아내는 상대에게 결국 우리는 무언가를 되돌려줘야 한다. 물론 그게 부담스러워서 처음부터 피해버리는 사람과는 애당초 그 법칙이 성립할 수가 없겠지만.

어찌됐든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그 부채감을 전가시키면 될 것 같다는 신박한 생각은 이제껏 못해 봤다.

Take and give to another person!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리라! 물론 나의 마지막 사랑은 내가 준 부채감을 이처럼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켜 버려서 황망하게 끝나버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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