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이트에 도착한 우리는 그후로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이런 일을 겪은 사람이 흐느끼는 않겠지만, 겪어온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의외로 최악의 기분은 아니었다. 여행은 아무 소득 없이 하루 만에 끝나고, 한 번 더 중국을 왕복하고도 남을 항공권 값을 추가로 지불했으며, 선불로 송금해봐라 숙박비도 식비는 아마도 날리게 될 것이 뻔했지만(실제로 환불은 못 받았다), 난생처음으로 추방하기 되어 대합실에 앉아 있는 것은 매우 진귀한 경험인 만큼, 소설가인 나로서는 언젠가 이 이야기를 쓰게 될 덧입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의 여행에 치밀한 계획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여행이 너무 순조로우면 나중에 쓸 게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느 나라를 가든 식당에서 메뉴를 고를 때 너무 고심하지 않는 편이다. 운 좋게 맛있으면 맛있어서 좋고, 대실패를 하면 글로 쓰면 된다. 그런데 그렇게 대충 아무거나 시켜버리는 내 버릇 때문에 피해를 보는 동행들도 없지 않았다. - “여행의 이유” p.15~16
- 소름끼치게 나와 닮았다. 원래 계획 세우기를 무척 싫어한 나는 나에게 선천적이고 유전적인 문제가 있는 줄 알았다. 아무 계획도 없이 일본에 가질 않나, 심지어 유럽에 가질 않나. 물론 유럽은 무계획으로 가기에는 동양인 관광객을 노리는 떠돌이 집시들이 많아서 위험하다는 아무 기사를 보고 패키지를 선택해 버린 탓에 더욱이 계획을 세울 필요가 없었지만. 아무튼 이런 나의 성향을 정당화해 준 것이 바로 MBTI였다. 특히나 MBTI 교육에 가서 나와 동일한 유형의 사람들과 자리를 같이 하면서, 세상에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꽤나 많구나, 하는 사실에 대단히 안심했다. 적어도 부모를 탓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와 별개로 어쩌면 나도 김영하 작가처럼 무계획이 주는 우연한 경험을 즐기기를 원했을지도 모른다. 남들이 짜 준 여행계획표를 따라, 어느 유명 블로거가 추천한 그 지역 맛집에 가서 - 솔직히 나도 몇 번 가본 적이 있지만, 소름끼치도록 죄다 한국인들만 줄을 서 있고, 식당 안에서는 정겨운 한국어가 들려온다, 심지어 그 나라 시민인 확실해 보이는 종업원도 한국어를 잘 하니 말 다했다 - 똑같은 음식을 즐기는 것은 나만의 이야기를 쌓는 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것만은 확실했다.
# 비둘기 고기(이집트)나 잉어 부레(중국) 같은 식재료로 만든 이색 요리를 원한다면 맨 아래에서부터 봐야 하고, 닭가슴살이나 쇠고기 등심 같은 무난한 요리를 원한다면 위에서부터 봐야 한다. 셰퍼드랑 굳이 이런 도전적인 요리들을 메뉴에 포함시키는 이유는 다양한 손님들의 기호를 만족시키면 목적도 있지만, 다른 식당과 차별화되는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과 실력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클래식 연주자들이 비발디의 사계나 쇼팽의 야상곡 같은 대중적인 곡들과는 레퍼토리를 짤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한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 “여행의 이유” p.17~18
- 물론 나만의 이야기를 쌓기 위해서라도 하더라도, 굳이 잉어 부레나 거미 튀김 같이 너무 독특한 음식을 선택하는 것은 저어한다. 그건 아무래도 배를 적당히 채워서 다음 여행을 이어가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 그러나 저가 여행을 소재로 뭔가를 쓰고 싶다면 밑에서부터 주문해보는 게 좋을 것이다. 때론 동행 중에서 따라 시키는 사람이 생기고, 그 인상적인 실패 경험에 대해 두고두고 이야기하게 될 것이고 누군가는 그걸 글로 쓸 것이다. 대부분의 여행기는 작가가 겪는 이런저런 실패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계획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성취하고 오는 그런 여행기가 있다면 아마 나는 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재미가 없을 것이다. - “여행의 이유” p.18
- 많은 사람들이 성공을 바라고, 또 돈을 많이 벌기를 원한다. 그리고 성공한 다음에는 정주영이나 이병철 자서전, 회고록처럼 자신만의 성공 이야기를 쓰고 싶어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성공과 부의 취득은 실패 없이는 도저히 이뤄질 수 없다. 나 또한 본캐(직장인)와 다른 부캐를 열심히 추구하고 있다. 평생 직장이란 것이 없는 시대이니, 부캐를 추구하는 행위는 본캐 이외의 영역에서 - 흔한 말로 여러 개의 파이프라인을 구축하는 행위 - 돈을 벌고 싶은 이유도 있겠지만, 어떻게 보면 다음 직장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아, 그래도 내가 이 일은 적성에도 맞고, 잘 하는 구나, 하는 일의 탐색과정. 말은 거창하지만, 현실로 포커스를 조금 옮겨오면 현실적으로 이렇다 할 - 유튜브에서 월 천만원 번다는 인간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건과!!! - 수익은 얻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요새는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수익이 이렇다하게 자랑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걸 실패로 정의해 버리는 것은 사회가 만들어낸 편견에 스스로 굴복하는 행위있다. (혹자는 체념했냐고 핀잔을 줄지도 모르지만) 어느 순간 나는 여정을 즐기기로 했다. 여정, 즉 그 과정을 여행이라고 비유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어쩌면 그 과정에서 수많은 실패담(일반적인 시각에서)이 나올 것이고, 나중에 두고두고 다른 사람과 즐거이 대화를 나눌 나만의 이야기가 가득히 나의 창고에 쌓일 것이다. 그게 여행의 묘미니까 말이다.
# 멀미란 눈으로 보는 것과 몸이 느끼는 것이 다를 때 오는 불일치 때문에 발생한다고 한다. 전혀 움직이지 않는데도, 즉 자동차나 비행기 안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어지러웠음 느낀다면 뇌는 이것을 비상한 상태, 즉 독버섯이나 독초를 먹었다고 판단하고 소화기관에 있는 음식물을 토해내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운전자는 멀미를 겪지 않는다. 차가 어떻게 움직이지를 예상할 수 있기 때문에 뇌가 그에 맞춰 준비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멀미는 뇌의 예측과 눈앞의 현실이 다를 때 일어난다고도 할 수 있다. 멀미약 패치를 귀 뒤에 붙이고 나타난 나의 무의식은 아마도 중국에서 내가 겪게 될 현실, 그것이 야기할 일정의 정신적 멀리에 대한 두려움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사회주의 중국은 내가 책을 보며 상상했던 나라와 너무도 달랐다. - 여행의 이유, p.49~50
- 인생을 여행에 비유를 많이 한다. 목표지향적이고, 성취지향적이고, 그건 걸 기꺼이 해 낼 능력을 지닌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어쩌면 범인인 우리는 인생 앞에서 언제나 멀미상태에 있는지도 모른다. 많은 선각자들이나 수많은 영화에서 지금 이 순간을 살라고 강조한 이유도 어쩌면 멀미를 피하는 방법을 알려준 것이 아닐까. 그 방법 말고, 우리의 원하는 방향과 실제 내 신체가 접하는 방향은 너무나 차이가 많이 나는 게 항상 인생이었으니.
# 고통은 수시로 사람들이 사는 장소와 연관되고, 그래서 그들은 여행의 필요성을 느끼는데, 그것은 행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거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다. -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 데이비드 시리즈
잠깐 머무는 호텔에서 우리는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잘 정리되어 있으며, 설령 엎질러진다 해도 떠나면 그만이다. 호텔 청소의 기본 원칙은 이미 다녀간 투숙객의 흔적을 완벽히 제거하는 것이다. - 여행의 이유, p.64~65
# <사랑의 블랙홀>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은 매일 똑같은 하루를 반복한다. 정확히 어제와 같은 오늘이 펼쳐진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잘 운영되는 호텔에서 느끼는 기분은 <사랑의 블랙홀>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이 끝없이 반복되는 듯하다. 그래서 일상사가 번다하고 골치 아플수록 여행지의 호텔은 더 큰 만족을 준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 문제들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고 나에게 그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할 것만 같아. 삶이 부과하는 문제가 까다로울수록 나는 여행을 더 갈망했다. 그것은 리셋을 대한 희망이었을 것이다. - 여행의 이유, p.66
# 풀리지 않는 삶의 난제들과 맞서기도 해야겠지만, 가끔은 달아나는 것도 필요하다. (중략) 흔히 ‘삼십육계 줄행랑’이라고 하는 말이 여기서 온 것이다. 근데 이후로 인간은 자연과 세계를 개조하고 통제하며 발전해왔고, 그런 정신을 이어받은 자기계발서들은 우리에게 주변의 문제들은 이럭저럭한 방법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고대의 지혜에 끌린다.인생의 난제들이 포위하고 위협할 때면 언제나 달아났다. 이제 우리는 칼과 창을 든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다른 적, 나의 의지와 기력을 소모시키는, 눈에 보직이 않는 적과 대결한다. 때로는 내가 강하고, 때로는 적이 강하다. 적의 세력이 나를 압도할 때는 이길 방법이 없다. (중략) 기억이 소거된 작은 호텔방의 순백색 시트 위에 누워 인생이 다시 시작되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힐 때, 보이지 않는 적과 맞설 에너지가 조금씩 다시 차오르는 기분이 들 때, 그게 단지 기분만은 아니라는 것을 아마 경험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 여행의 이유, p.67~68
- 이십대의 나는(아니 삼십대 중반의 나까지도) 그야말로 자기계발, 아니 자기계발서에 중독되어 있었다. 20대에 서점에서 집어든 토니 로빈슨이 쓴 “네 안의 잠든 거인을 깨워라”라는 자기계발서는 아직도 내 책장에 꽂혀 있다. 당시에는 토니 로빈슨도 아주 젊었다. 표지에는 젊은 그가 잇몸과 이를 마음껏 드러내고 활짝 웃고 있다. 자기계발서를 좋아했지만, 그다지 많이 구입하기는 않았는데, 토니 로빈슨의 책을 사 버린 것은 어쩐지 자기계발서의 모든 것이 담겨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당시의 나의 눈에는 7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자랑하는 자기계발서의 백과사전처럼 보였다. 이 책만 다 읽어낸다면 이후의 어떤 자기계발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어떻게 보면 자기계발서의 고전의 반열이랑 수 있는) 나폴레옹 힐, 토니 로빈슨, 그리고 (토니 로빈슨이 나를 100% 만족시켜 주지는 못했기에 끊임없이 더 완벽한 자기계발서를 찾아 헤맸다) 그 이후에 수많은 자기계발서 저자들을 보면서 나는 한 가지 의문에 빠졌다. 왜 이 사람들은 자기계발서 말고는 이렇다할 사업을 하지 않을까, 이렇게 완벽한 성공 로드맵을 알고 있다면 또 다른 사업을 일으켜서 보란 듯이 더 큰 부와 성공을 거머쥘 수 있으랴-노데, 왜 이 사람들은 평생을 자기계발 강의, 세미나를 열고, 밀리듯이 유사한 내용의 말들이 즐비한 책들을 계속해서 내는 것일까.
나중에 알고 보니 자기계발의 영역은 하나의 산업이었다. 미래의 핑크빛 성공, 희망을 노래하는 산업. 일요일마다 그런 모습을 보는 것 같지만 자못 민감할 수 있어서 말을 삼가겠다.
어떻게 자기계발은 하나의 산업이 될 수 있었을까. 인간이 자연을 통제하면서부터가 아니었을까. 이성의 힘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재단하고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다는 믿음. 근대주의의 발달. 그런 폐해를 우리는 1,2차 세계대전을 통해 목격했지만, 아직까지 전혀 타격을 받지 않고 여실히 살아 있는 분야가 바로 자기계발 분야가 아닐까.
이렇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선형적 인생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분야가 바로 자기계발 산업의 실태가. 그런데 인생은 선형적으로 아니한 걸 뻔히 알면서도 사람들은 속아 넘어가 버린다. 왜냐면 공식대로 살면 인생이 편해질 것만 같으니까. 이렇게 하면 월 천만원을 벌 수 있어요, 라는 매뉴얼이 판치는 세상. 물론 이런 건 비단 지금만의 현상은 아니었지만.
나 또한 오랜 세월 선형적 인생관을 추구해 왔다. 하루라도 새벽 5시에 일어나지 않으면 그 동안 쌓아왔던 탑이 한 순간에 무너질 것만 같고, 그렇지 않더라도 금이 가서 언젠가는 위태로워질 것 같다는 숨학힌 생각들이 나를 지배했다. 때론 삼십육계 줄행랑이 정답인지도 모른다.
해외로는 여행 - 특히나 아시아를 벗어난 여행 - 은 어쩌면 낯선 시간과 낯선 환경 덕분에 선형적 인생관이 깨어지는 순간을 경험하는 것이다. 지금이 한국 시간으로 새벽 5시인지, 저녁 5시인지 몸과 정신은 혼란스러워 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몇 일을 보내고 나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게다가 여행에서는 시간들이 재밌으면 더더욱). 굳이 그렇게 애쓰며 살지 않아도 인생은 흘러가는 거구나. 시간은 흘러가는 거구나. 어떻게 보면 운명, 숙명이라면 단어에서도 한 순간만큼은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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