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첫 번째 만남
한국인이 사랑하는 대표적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그의 자전적 에세이입니다. 이 책은 실은 두 번째 읽는 중입니다. 첫 번째는 한 2년전쯤으로 기억합니다.
제가 하루키를 처음 만난 것은 아주 어렸을 적입니다. 중학생쯤이었을 것입니다. 책장에 꽂혀 있던 "상실의 시대". 중학교 때부터 문예반에 들며 시를 썼던 큰 누이의 책이었습니다. 학교에서 발간되는 시집에 늘 한 자리를 자리잡았던 큰 누이. 당시에는 큰 누이가 커서 시인이나 소설가가 될 줄 알았습니다만. 바로 그 큰 누이의 서재에서였습니다. 실은 서재라기 보다는 두 칸짜리 책장이었지만요. 그 책장에 꽂혀 있던 시집, 소설류는 모두 큰 누이의 것이었습니다. 제 것이라고는 부모 몰래 책상 밑 박스 뒤에 100센티 가량 수북이 쌓여 있던 만화책이 고작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안 걸릴 거라 - 부모님은 전혀 모르실 거라 - 생각했던 자신이 무척이나 순수했던 듯싶네요.
아무튼 '상실의 시대'로 저는 하루키와 처음 만났습니다. 당시에는 검은색(?) 호기심이 왕성했던 시절이라 앞부분을 조금 읽다 그런(?) 부분만 발췌(?)해서 읽었던 것 같아 전체 이야기는 솔직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이게 상실의 시대인지는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어린 주인공이 방 안에서 잠이 들었다가, 어렴풋이 눈을 떴는데, 어머니가 아버지와 격렬한 사랑을 나누고 있었고, 그 남자가 실은 아버지가 아니라 다른 남자였다는 것을 나이를 먹고 나서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어린 나이였지만, 소설 속 그 장면이 몇 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뇌리에 강렬하게 박혀 있네요. 그 장면이 너무나 충격적이라서 - 사실은 그런(?) 호기심을 충촉시켰다기보다는 상당히 불편해서 더 발췌(?)하기를 멈추고 덮었던 것 같습니다.
그 후로 하루키를 다시 찾은 것은 "1Q84"였습니다. 역시 몇 십 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그것도 원서로 말입니다. 몇 년 전 이 책이 말 그대로 개나 소나 다 읽던 시절에 호기심이 동해서, 어디 한번 읽어보자는 심산으로, 당시에는 인생의 모든 것이 영어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영어 원서로 샀습니다. 역시나 상실의 시대에서 꽤나 충격을 줬던 하루키답게 초반부부터 격렬한 사랑이 등장합니다다. 덕분에 몰입이 잘 되었습니다만.
약 3분의 1을 읽다가 영어에 대한 애정이 시들해져, 지금은 책꽂이에 꽂혀 있지만, 그래도 등장인물들이 꽤나 흥미로웠습니다. 천재적인 글쓰기 재능을 가진 소녀. 그녀의 재능에 관심이 있는 남자 소설가. 그리고 격렬한 사랑 이후 목표를 제거하는 여자 킬러.
저는 소설을 별로 좋아라 하지 않습니다. 혹자는 소설을 통해 인생의 간접경험을 할 수 있다, 여러 군상들을 간접적으로 미리 만나볼 수 있으니, 인생에 대한 관조가 깊어지고, 인간관계를 더 잘 해 나갈 수 있다, 라는 식으로 독서의 효과를 주장하지만, 모르겠습니다. 아직 별로 소설을 안 읽어봐서 실감이 가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강해서인지 소설보다는 직접적인 에세이, 자기계발류나 인문학 서적을 즐겨 읽는 편입니다. 기본적으로 저는 에둘러 말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역으로 얘기하면 직접적으로 얘기하지 않으면 이해도가 떨어진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웃음).
- 자신의 머릿속에 어느 정도 윤곽이 선명한 메시지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일일이 스토리로 치환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윤곽을 그대로 곧장 언어화하는 게 훨씬 더 빠르고, 또한 일반인들이 받아들이기도 훨씬 쉽겠지요. 소설이라는 형태로 전환하자면 반년씩이나 걸리는 메시지나 개념도 그걸 그대로 직접 표현하면 단 사흘 만에 언어화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마이크를 향해 생각나는 대로 말해버린다면 단 10분이면 끝날지도 모릅니다.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은 물론 그런 것도 가능합니다. 듣는 사람도 '아하, 그렇구나'하고 공감할 수 있습니다. p.21
그 표현하기 어려운 마음을 하루키가 그의 에세이에서 이렇게 대변해 주고 있네요. 그러니까 소설가라는 것은 몹시도 어떤 일을 어렵게 처리하는 인종이라는 말입니다. 하루키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소설가란 불필요한 것을 일부러 필요로 하는 인종'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소설을 쓴다는 것은 상당히 멀리 에둘러 가는,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며, 몹시 '둔해빠진' 작업이라고 말합니다. 몹시 공감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랑합니다"라는 말 한마디면 채 1분도 안 되어 (그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질 수 없지만) 사랑을 고백하고, 표현할 수 있는데, 소설가라는 직업은 그 한마디를 하기 위해서 300, 400페이지, 심지어 몇 권에 걸쳐 에둘러 간다는 뜻입니다. 왜 이렇게 고백하기가 힘들단 말인가. 마음이 급한 사람들은 소설 초입 부분에서 그냥 돌아가 버립니다. 그리고 (나처럼) 아예 펼치지 않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다면 소설을 쓰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에서 소설을 쓸까?(* 개인적으로 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에서 소설을 읽을까 와 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하루키가 말합니다.
- 하지만 소설가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바로 그런 불필요한 면, 멀리 에둘러 가는 점에 진실, 진리가 잔뜩 잠재되어 있다, 라는 것입니다. 어쩐지 강변을 늘어놓는 것 같지만 소설가는 대체로 그렇게 믿고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소설 따위는 없어도 상관없다'라는 의견이 있어도 당연한 것이고, 그와 동시에 '이 세상에는 반드시 소설이 필요하다'라는 의견도 당연합니다. 그건 각자 염두에 둔 시간의 스팬(span)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서,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의 틀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효율성 떨어지는 우회하기와 효율성 뛰어난 기민함이 앞면과 뒷면이 되어서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중층적으로 성립합니다. 그 중 어느 쪽이 빠져도(혹은 압도적인 열세여도) 세계는 필시 일그러진 것이 되고 맙니다. p.24
작가라 그런지 묘하게 설득력이 있네요. 제 안에서도 빨리 무언가를 성취해야겠다는 성급한 욕정이 있고, 그런 반면 현재에 꾸준히 투자하면 언젠가는 그 씨앗에서 싹이 틔고 자라나 열매를 맺으리라는 느긋한 욕정이 있습니다.
# 더 읽고 싶으시다면?
'문화서적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영하 작가의 <읽다> (ft. 독서의 효용) (0) | 2022.05.15 |
---|---|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1편 (0) | 2022.05.15 |
지바 마사야의 "공부의 철학": 나는 좋아요의 삶을 살고 싶지 않다 (0) | 2021.11.23 |
짐 로저스의 "위기의 시대, 돈의 미래": 제대로 된 투자처는 어디인가? (0) | 2021.11.23 |
아빠와 딸의 주식투자 레슨: 워런 버핏의 가치투자를 배울 수 있는 책!!! (0) | 2021.11.2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