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서적 리뷰

이석명 교수의 <노자> 발췌

by 북노마드 2022. 8. 5.
728x90
반응형

# 옛날에 양 무제가 달마 대사에게 물었다. “저는 많은 절을 지어서 보시했는데 이만하면 고덕이 크다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달마가 대답했다. “공덕이 없습니다.” 어째서 달마는 양 무제가 공이 없다고 말했는가? 양 무제는 공덕을 의식하면서 공덕을 쌓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절을 지어 부처님께 바쳤지만 사실은 부처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바친 꼴이 되었다. 이처럼 덕을 의식하면서 덕을 행하는 사람이 하덕 의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작은 덕을 행하고도 그것이 드러나지 않을까 조바심한다. 조바심하셔서 의도적으로 행하는 얄팍한 덕 이기에 결국 덕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 노자 p.369

- 어릴 적은 선한 행동을 한다는 걸 의식하지 못했다. 아니 의식한다고 하더라도 그로 인해 어떤 결과를 바라지 않았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현세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호의를 바라지 않았다. 굳이 바란 것이 있다면 내세의 행복 - 이를테면 천국에 가는 일 같은 - 을 바랐다. 나이를 조금 더 먹고 나는 선행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반응을 지나치게 의식하게 되었다.

내가 이런 걸 했는데 왜 반응이 없지? 당연히 칭찬해 줘야 하는 거 아냐? 염치도 없는 사람들.

내세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는지도 모르고, 아니면 현재의 행복을 미래에 양보하기 싫다고 생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현재의 나의 심리 상태가 지나치게 빌빌 꼬여 있다는 사실을 차치하고, 노자에 따르면 과거의 나는 상덕에 속 했고, 지금의 나는 하덕 에 속하는 것일까?

#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본원을 통해 현상을 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상을 통해 본원을 파악하는 것이다. 노자는 전자를 추천하고 있다. (중략) 선종에서 말하듯이 돈오는 이루었지만 아직 점수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다. 그래서 자식을 통해, 다시 말해 만물의 개별 현상들에 대한 경험적 이해를 통해 다시 어미, 즉 도를 온전히 이해하고 실천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노자, p.480


# “도가도, 비상도”라고 했듯이, 도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 도는 싱싱한 물고기처럼 파닥파닥 살아 있는 데 반해 언어는 식은 재처럼 싸늘하게 죽어 있다. 때문에 죽은 언어로 살아 있는 도를 표현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중략) 그러면 노자 자신이 하는 말은 무엇이란 말인가? (중략) 어쨌든 노자는 수많은 말을 했고 그 말들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지 않은가. 얼기설기 노자가 자기모순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노자”라는 책이 시의 형태로 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는 침묵에서 나온다. 시는 한 침묵에서 다른 침묵으로 가는 길 위에 있다. 시인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압축하고 압축하여 최대한 간결한 언어로 표현해 넣는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나온 시는 침묵의 도 다른 형태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말이 아니라 침묵의 드러납니다. 노자는 시를 통해 말을 사라지게 했다. 함축된 시어를 통해 수많은 말을 침묵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상징과 은유를 통해 다시 침묵을 토해 냈다. 그것이 바로 “노자”라는 책이다. 노자는 수천 마디 말을 했지만 실제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 셈이다. - 노자 p.515~516

- ‘도’와 ‘덕’의 차이는 무엇인가? 도는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 도가 현현하여 실체를 드러낸 것이 ‘덕’이다. 그러므로 도를 깨우친 지도자는 덕을 갖춘 지도자로 보이기 마련이다.

- 노자는 ‘무위’와 ‘균형’을 중시여겼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를 낮추라고 했던 노자 지만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자신을 숨기고 낮추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것 또한 무위에 어긋나는 것이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