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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서적 리뷰

나니아 연대기 작가 C.S. 루이스의 "책 읽는 삶" : 소설 읽지 말라구요??

by 북노마드 2021.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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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 루이스.

우리에게는 <나니아 연대기>라는 작품으로 친숙한 작가입니다. 이 분은 매일 7~8시간을 책을 탐독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책아일체인 분이십니다. 이 분이 <책 읽는 삶>이라는 책을 내셨습니다. 정확히 얘기하면 이 분이 썼던 편지나 에세이에서 발췌한 글들을 엮어서 출간한 책입니다. 그래서인지 드문드문 끊기는 부분들이 보여서 정확히 이분이 무슨 얘기를 하시는지 애매한 부분들이 있어 약간 아쉽기도 합니다.

출처 :&nbsp;http://www.yes24.com/campaign/01_book/dirPresent/dirPresent.aspx?EventNo=205536&amp;CategoryNumber=001

1.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에 대한 극찬

이를테면 이런 부분들입니다. 루이스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대해서 언급한 구절입니다. 소제목은 "레오 톨스토이"입니다.


# 지난번 편지를 쓴 뒤로 내게 있었던 가장 흥미로운 일은 <전쟁과 평화>를 읽은 것인데, 이로써 소설을 보는 내 관점이 완전히 달라졌다네.
여태까지는 늘 소설을 약간 위험한 종류로 보았지. 문학전반의 건강에 위험하다는 뜻일세. 소설은 강한 "이야기 욕구"(결망을 알고 싶은 견딜 수 없는 궁금증)를 불러일으키는데, 나는 이 욕구가 필연적으로 해를 끼친다고 생각했네. 더 낫지만 덜 불가항력인 다른 종류의 문학적 즐거움을 볼 줄 아는 안목을 짓밟는다고 말일세.
또 독자를 통속적 부류와 지식인 부류로 비참하게 갈라놓은 현상도 나는 다분히 소설 읽기가 증가한 탓이라고 보았네. 통속적 부류란 책을 처음 읽을 때부터 그저 "이야기 욕구"가 학습된 탓에, 더 나은 즐거움을 볼 줄 아는 자신의 안목을 지레 말살해 버린 사람들이지.
그런데 톨스토이가 이 책에서 그 모두를 바꾸어 놓았네.
- 친구 아서 그리브즈에게 보낸 편지, 1931년 3월 29일

저는 처음 읽었을 때 무슨 말인가 싶었습니다. 두 세 번을 읽어보고서야 어떤 뜻인지 그나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루이스는 문학 중에서 소설을 경계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문학은 줄거리, 이야기꺼리를 뛰어넘는 그 무엇인가가 있는데, 소설은 자칫 이야기에만 집중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어서 문학의 다른 위엄들(?)을 보는 안목을 해치는 경향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아마 루이스가 기욤 뮈소의 소설을 읽었다면 경악을 금치 못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결론이 어떻게 되는 거야, 주인공 어떻게 되는 거야, 라는 호기심을 충족시키려다 기욤 뮈소가 묘사해 놓은 배경들을 설렁설렁 읽은 적이 꽤나 있었습니다. 루이스가 말한 "이야기 욕구"에 함몰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그 편견을 바꿔놓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 뒤 부분이 없어서 제가 해석하기에는 그렇게 읽힙니다. 즉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라는 소설을 통해서 독자의 이야기 욕구를 잡는 동시에 문학작품의 위용마저 지켜내고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야기가 어떻게 되지, 라고 스킵하기에는 톨스토이가 곳곳에 배치한 어떤 문학적 장치들 - 저는 아직 안 읽어봐서 잘 모르겠지만, 그게 문체일수도 있고, 역사적 배경지식일 수도 있겠죠 - 이 뛰어나다는 의미입니다.

자, 그런 면에서 다음 작품은 민음사 기준으로 무려 4권으로 구성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도전해 보려고 합니다.


2. 단테의 <신곡>에 대한 극찬

또한 루이스는 단테의 신곡에 쓰인 시에 대해서 극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 여태 내가 읽은 모든 시 가운데 대체로 단테의 시가 최고다. 그런데 그의 시의 탁월함이 최고 정점에 이를 때면, 정작 단테가 하는 일은 별로 없어 보인다. 위대한 시가 저절로 써지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든다. 기껏해야 시인은 최소한의 역할로 군데군데 살짝 손만 대서 에너지의 방향을 잡아줄 뿐이고, 대부분은 에너지가 저절로 뭉쳐 절묘한 전개로 <신곡>을 이루어 나간다. (중략) 요컨데 시 예술 전반에 최고 경지는 결국 일종의 물러남이다. 거기에 도달하려면 시인의 눈에 비친 세상 전체가 그의 뇌리에 아주 깊숙이 들어와 있어야 한다. 그러면 이제 시인은 길을 비켜나기만 하면 된다. 가만히 있으면 파도가 밀려오고, 산들이 잎을 흔들고, 빛을 비쳐 들고, 천체가 회전한다. 이 모두가 시를 짓는 데 필요한 소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시다.

멋있지 않습니까? 단테의 신곡은 초반부분이 하품이 나와서 접고 말았는데, 다시 도전을 해야겠다는 욕구가 넘쳐납니다. 루이스와 저의 차이를 굳이 짐작해 본다면, 단테의 신곡은 기독교 문학의 정수로 여겨지는데, 아무래도 저는 유럽 사람들보다는 기독교 문학의 깊이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 성경조차 안 읽어본 저로서는 - 굳이 변명해 봅니다.

사실 루이스 자체가 1898-1963에 살았기 때문에 58년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리 오래 전 분은 아닐 수 있습니다. 이 분이 고전 읽기를 강조하는 편입니다.

신서 세 권에 적어도 1권의 고서(고전)를 읽어야 한다.

신서 3권에 고전 1권이니, 요새 너무 기욤 뮈소라는 신서에만 올인해 있지 않았나 못내 반성해 봅니다.

세계문학이라는 고전과 트렌드를 잃지 않기 위한 신서를 골고루 읽는 습관을 들여야겠습니다.

하루에 7~8시간씩 독서하신 분의 조언이니 아로새겨야 할 부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럼 독서 부자 되시고, 오늘 하루도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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