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찮게 밀리의 서재에서 이 책을 봤다. 밀리의 서재에세만 독점 판매되고 있으니, 일반 서점에서는 구할 수 없는 책이다.
"우리는 글쓰기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글쓰기 관련된 책이다. 글쓰기 관련된 책은 안 본지 오래 되었다.
물론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는 예외다. 약 2년 전부터 드문드문 소설을 쓰고 있는데 - 물론 습작기라고 스스로 정의한다 - 흔들릴 때마다 펼쳐 보는 책이다. 힘을 내세요, 당신은 할 수 있어요, 라는 호소 짙은 문장은 없다. 다만 많이 읽고 많이 쓰면 누구나 그럭저럭한 작가는 될 수 있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아서다. 위대한 작가는 못 되더라도 작가로 이 생에 이름을 남길 수 있다면 더 없이 행복할 것 같다.
스티븐 킹은 그의 책에서 소설가가 되고 싶다면 하루에 최소 단어수 천개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것도 최소치이다. 처음에는 목표를 낮게 잡아야 실망할 일을 없을 거라고 말하면서 언급한 게 하루 일천단어 쓰기이다. 실제로 써 보니 천 단어를 쓰려면 대략 1시간 정도가 필요하다.
나의 현실은 둘 중 하나를 충족하면 족하다. 1시간을 채우거나 또는 1000자를 채우거나. 그만큼 창작은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허구를 쥐어짜서 쓰는 것 같기도 하고 - 말 그대로 단어수나 시간을 채우기 위해서 - 마치 대학시절에 죽어도 쓰기 싫은 레포트의 장수를 채우기 위해 자주 했었던 "여간 ~ 한 게 아니지 아니하다로 말하지 아닐 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라는 식의 글쓰기를 하는 기분이다.
그런 와중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이 책을 보게 되었다. 이유는 아마 목차를 보다 한 번 쓱 무슨 말을 하는지나 보자라는 마음에서 가볍게 넘길 생각이었다.
물론 실제로도 30분도 안 되는 시간에 가볍게 넘겼다. 속독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필요한 부분만 찾아서 봤다. 이걸 "발췌독"이라고 정의해 버리면 정이 없다기 보다는 가볍게 본 그 맛이 살아나지 않는 것 같다. 발췌독이라면 뭔가 논문이나 레포트를 쓰기 위해 무겁게 읽은 느낌이니까.
아무튼 다른 딱 세가지 포인트가 기억에 남는다.
1. 나는 돈을 벌지 않아도 글쓰기가 좋다.
소설을 써보겠다는 생각은 실은 해리 포터의 조앤 롤링의 성공을 보고 마음 먹은 바 크다. 웹소설이 돈이 되는 것은 이제는 공공연한 사실이지만 소설을 막 써보겠다고 결심했던 2년 전만 해도 아직은 종이책 작가로 데뷔하는 것이 작가로서 성공으로 가는 정도였다.
어떻게 보면 티스토리 블로그, 크몽 전자책 발간 등의 노력 등은 글을 써서 돈을 왕창 벌어보겠다는 내 욕심의 발로가 컸다.
물론 "우리는 글쓰기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의 작가도 글쓰기의 동인으로서는 그런 욕심이 나쁘지 않다고 말한다. 실제로 글쓰기 자체만을 동인으로 삼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고까지 한다. 많은 사람들이 글쓰기로 벼락부자가 되고 싶다거나, 이성에게 어필하고 싶다든가 등의 욕심으로 글쓰기에 입문하고, 또 지속적으로 쓰고, 그런 과정에서 글쓰기 자체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밟는다고 한다.
그러니 나의 부자 욕심도 그리 나쁜 것은 아닐 터이다. 다만 너무 집착하기 때문에 문제다.
그런데 오래 글을 썼던 분이라서 그런지 책의 작가는 다른 일은 어떻게든 수지타산을 재는데 글쓰기에서만큼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효율성으로 따지면 그렇게 비효율적인 게 글쓰기라는 것이다. 엄청난 공을 들여서 쓴 작품이 아무런 인기를 못 얻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짜깁기로 엉성하게 쓴 글이 인기를 얻어 많은 돈을 가져다 주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반성이 많이 되었다. 여전히 나는 글쓰기로 돈을 벌고 싶다. 내 스스로 계획한 10년간의 소설 습작기를 거쳐 10년 후에는 내 소설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으면 좋겠다는 욕심은 여전히 왕성하다. 아니 당장이라고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역시 그 과정에서 너무 돈에 집착하면 글쓰기 자체가 즐겁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고 있던 와중에 이 책에서 위로를 받았다.
정말 다른 루트로 돈을 왕창 번다면, 그저 매일 생각하고 그걸 기록하는 것에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있을텐데, 하고 말이다.
실은 그게 내 꿈이다.
난 걷는 것을 좋아한다. 걷고 그 와중에 만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또 기회가 되면 그들과 자연스레 이야기를 나누고, 그 이야기를 기록하고, 거기에서 버무려져 나오는 내 생각을 기록하는 것. 기실 아직까지는 소설보다는 이런 식의 글쓰기가 더 편하다. 무엇보다 지어낼 필요는 없으니까(웃음).
실은 다른 형태의 부캐 노력을 하는 이유(이모티콘, 블로그, 유튜브, 전자책 등)가 실은 궁극적으로 저런 삶을 살고 싶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돈에 구애받지 않고(*이미 다른 식으로 많이 벌어놓고) 자유롭게 생각을 펼치고 그걸 기록하는 것.
# 글을 쓰며 사는 일은 그다지 가성비가 좋지 않다. 어느 정도 글을 다듬고 완성할 수 있게 되고 책을 몇 권쯤 쓰게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다른 데 투자한다면, 확실히 더 효율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막연히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며 읽었던 책 수천 권, 매일 글을 스며 보냈던 시간, 그렇게 쌓인 노트와 원고들이 내게 현실적으로 준 것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만큼의 노력과 시간을 들여 다른 공부를 하거나 일을 했다면, 통장에 쌓인 잔고 숫자나 갖고 있는 자동차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그렇게 보낸 시간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중략)
마치 아이를 목욕시키거나 아내와 산책하는 일과 비슷하다. 아무리 생활이 바쁘고 촉박한 상황에서도, 아이 목욕을 시킨 걸 후회한 적은 없다. 아내와의 산책은 항상 소중했다. 글쓰기도 그랬다. - "우리는 글쓰기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中
저자는 아이 목욕을 시키는 것, 그리고 아내와의 산책과 글쓰기를 대등시한다.
문득 '시간의 두께감'에 대해 생각해 봤다. 나 또한 좋은 사람들,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을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날은 중시 여기는 아침형 인간 루틴을 깨도 되고, 소설 쓰기를 안 해도 된다. 왜냐면 더 소중한 것들을 하고 있으니까. 또 그런 날에는 시간이 너무 훌쩍 가 버린다.
그런데 어떤 날은 분 단위로 시간을 봐도 시간이 가지 않는다. 넷플릭스를 보지 않고서는 그 시간을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다. 기실 그 까닭은 소중한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문득 자문해 본다.
이것이 아인슈타인이 말한 상대성 이론이자, 쉬운 말로는 시간의 두께감이 아닐까 싶다.
2. 글쓰기는 몸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 주위에 정말 식상한 말들이 많다. 그런 표현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삼시 세끼 밥 먹는데 길들여지면 한끼라도 거르는 게 몹시 이상한 것처럼 그냥 이 표현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떠올라서 쓸 수 밖에 없는 표현들 말이다. 개중에 글쓰기 관련해서는 이런 말이 유명하다.
"글은 머리가 아니라 엉덩이로 쓴다"
그러니 엉덩이 딱 붙이고 눌러 앉아서 글을 써야 한다는뜻이다. 이런 저런 핑계대지 말고 말이다. 그런데 너무 식상해서 이제 가슴으로 와 닿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글은 몸으로 하는 것이다, 라는 표현이 나온다.
# 그 이유는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글쓰기는 '머리'로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몸'으로 하는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나는 글쓰기가 몸에 익은 습관 같은 것이고, 몸으로 삶을 살아내는 일이며, 몸이 머리를 이끌고 가는 일이라 믿고 있다. 그렇기에 사실 글쓰기를 꾸준히 할 수 있는 비법, 글쓰기를 남다르게 해낼 수 있는 방법을 '머리로' 배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매일 아침 일어나 피아노 연주를 허거나, 매일 저녁 강변을 달리거나, 매일 밤 춤을 추는 일처럼, 글 쓰는 일도 일상의 어느 영역에 말착되어, 몸이 하는 일이다. - "우리는 글쓰기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中
몸으로 한다. 피아노를 배우고 있는데, 멀리 휴가를 다녀와서 일주일만에 피아노 앞에 앉았다. 다 잊어버렸겠지, 싶었는데 생각보다 잘 쳐졌다. 무의식이 작동하고 있었다느니, 숙성을 위해서는 조금의 거리두기가 필요하다느니 라는 일상의 발견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몸으로 하는 것은 쉬이 잊혀지지 않는다는 단순한 말을 하고 싶은 것뿐이다. 수저를 집는 것과 같이 잊혀지지 않는 동작. 몸이 익숙해져이다.
물론 엉덩이도 몸의 일부다. "엉덩이"가 묵직한 근성을 강조한 메타포라면, "몸"은 나의 일부라는 의미가 강해서 더 마음에 드는 표현이다.
소설쓰기도 내 몸의 일부가 되는 그 날이 오리라 믿는다.
3. 단문쓰기에 대해서
제목을 '단문쓰기에 대해서'로 지었는데 여기까지 오느라 무척 오래 걸렸다. 막상 쓰다보니 다른 말들을 많이 해 버렸다. 하지만 본디 필요한 말들이었다.
글쓰기 비법서(?)를 보면 무조건 빠지지 않고 나오는 말이 있다. 오랜 세월 사람들에게 회자가 되면 속담이나 격언이 되는데, 그런 관점에서 보면 글쓰기 속담축에 속할 말일게다.
짧게 써라.
나도 이 말에 오랜 시간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본디 만연체인 나의 글쓰기에 그다지 적용은 되지 않았지만. 하지만 나는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단문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실제로 그렇게 시도해 본 적도 여러 번 있다. 방법은 간단하다.
1) 일단 쓴다. 내 식으로.
2) 문단을 자른다. 복문은 단문으로.
3) 쓸데없는 조사나 부사를 무조건 뺀다.
이 과정을 거치면 쉽게 짧게 쓸 수 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 무리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를 읽으면 하루키가 왜 인기 있는 작가이고, 그가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명이 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수작이다.
이게 그냥 내 식으로 한 숨에 쓴 문장이다. 고쳐 써보겠다.
- 무리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를 읽으면 그가 인기작가인 이유와 노벨문학상 후보로 끊임없이 거명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 무리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를 보면 그의 명성의 이유를 알 수 있다. 노벨 문학상 후보로 매년 거론되는 이유도.
이 정도 변환을 통해서이다. 급하게 지어내느라 내가 보기에도 예시가 퍽 와닿지는 않지만, 대충 어떤 느낌인지는 아실 것이다.
퍽이나 오래 단문에 대한 집착에 사로 잡혀 있던 나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이 책에서 들려준다.
사람의 형상이 제각각 다르니 그 문체도 다양한 게 맞다는 주장이다. 단 맛만 있고, 짠 맛, 매운 맛, 신 맛이 없으면 얼마나 음식의 세계가 단조롭겠는가. 흰색과 검정색만 있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건조해 보이겠는가. 문체는 맛과 같고 색깔과 같다.
이 말은 앞서 밝혔던 글쓰기는 몸이라는 수사와 맞닿는다. 사람의 몸의 얼굴, 손, 발 등 구성요소는 같지만 그 생김새는 제각각인 것처럼 글쓰기도 백놈이 있으면 백개의 글 스타일이 나와야 맛스러운 것이다. 그래야 책을 읽어볼 맛이 나지 않겠는가.
죄다 헤밍웨이식으로 짧고 건조하게만 쓴다면 글쓰기 잔치에 놀러 온 사람들이 얼마나 그 잔치를 즐기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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