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누구에게나 먹히는 글쓰기 비방! (쉿!)

무라카미 하루키따라 쓰기 : 해변의 카프카 #1

by 북노마드 2021. 11. 12.
728x90
반응형

작가가 되고 싶다면 무엇보다 두 가지 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슬쩍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지름길도 없다. - 스티븐 킹.

여기에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 중에 감동을 받은 작품을 모사하는 작업을 오늘부터 일부 병행해 보고 있습니다.
같이 해 보실래요?

 

최근에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라는 작품을 읽었습니다. 충격적이더군요.  

 

그 유명한 하루키는 이제서야 읽어서 어쩐지 늦둥이를 가지면 이럴 기분일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늦둥이더라도 새로운 생명의 잉태는 언제나 설레고 귀중한 법입니다. 늦게나마 하루키를 접할 수 있어서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드는 요즈음입니다.


'모방'이 창작의 첫걸음입니다.  

 

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원문]

잠깐 잠들었다가 깨어나기를 몇 번이고 되풀이한다. 내 머릿속은 그녀가 나타나는 순간을 포착하고 싶은 생각으로 꽉 차 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소녀는 이미 어젯밤의 그 의자에 앉아 있다. 머리맡에 놓인 시계의 야광 바늘은 세 시를 조금 지난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침대에 들어가기 전에 분명히 닫아놓은 커튼은 어느 틈엔가 열려 있다. 어젯밤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달은 나와 있지 않다. 그것만이 다르다. 구름은 두텁고 비도 약간 내리고 있는지 모른다. 방 안은 어젯밤보다 훨씬 어둡고, 멀리 보이는 정원등의 불빛이 정원의 나무들 사이로 새어 나와 희미하게 비치고 있을 뿐이다. 그 어둠이 눈에 익을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 

 

[내식으로 다시 쓰기]

선잠에 들었다 깨어났다, 몇 번을 반복하는지 모르겠다. 이럴 바에는 잠을 청하는 행위 - 불을 끄고 눕는 - 자체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싶다. 내 머릿속은 온통 그녀가 나타나는 그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어느새 그녀는 어제밤의 그 의자에 앉아 있었다(나의 의지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머리맡 시계는 세 시를 조금 지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야광 바늘으로 시간을 가늠할 수 있었다. 이불 속으로 몸을 숨기기 전에 닫아놓은 커튼은 어느샌인가 열려 있다. 어젯밤도 그랬다. 다른 점이라곤 달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름이 두텁게 깔리고 비도 조금씩 내리고 있는지 모른다. 방 안은 어젯밤보다 어두웠고, 멀리 보이는 정원등의 불빛만이 나무들 사이로 비집고 나와 희미하게 비치고 있다. 칠흑같은 어둠이 눈에 익을 때까지는 언제나 시간이 걸린다. 

 

>>> '해변의 카프카'는 하루키의 바로 전작(아마도)인 '스푸트니크의 연인'에 비해서 비유가 많이 빠져 있습니다. 스푸트니크의 연인은 마치 비유 백과사전처럼 두 세 문장마다 한 번씩 비유가 등장합니다. 어쩔 때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이. 그런데 신기한 점은 그렇게 많은 비유를 사용하는데도 전체 줄거리에 해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되레 문장이 맛있고, 계속 읽고 싶어지고, 즉 문장의 맛과 이야기의 맛, 두 마리 토끼를 하루키는 '스푸트니크의 연인'에서 한꺼번에 잡고 있습니다. 


[원문] 

집을 떠나기 전에 욕실에서 비누로 손을 씻고 세수를 한다. 손톱을 자르고, 귀 청소를 하고, 이를 닦는다. 시간을 들여 될 수 있는 대로 몸을 깨끗하게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깨끗하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때도 있다. 그러고 나서 세면대 거울 속의 내 얼굴을 주의 깊게 바라본다. 거기에는 내가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 사실은 어머니 얼굴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 유전으로 물려받은 얼굴이 있다. 아무리 거울 속의 표정을 무덤덤하게 바꾸고, 아무리 눈을 가늘게 떠서 표정을 바꾸어본다 해도, 아무리 근육을 몸에 붙인다 해도, 얼굴 모습을 바꿀 수는 없다. 또 아무리 간절하게 원해도, 아버지한테 물려받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길고 짙은 두 눈썹과 그 사이에 깊게 파인 주름살을 지워버릴 수는 없다. 그렇게 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아버지를 죽일 수도 있다(그건 현재의 내 힘으로는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머니를 기억에서 말살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안에 있는 그들의 유전자를 쫓아낼 수는 없다. 만일 그것을 쫓아내고 싶다면, 나 자신을 내 안에서 추방하는 수밖에 없다. 

 

[내식으로 다시 쓰기]

집을 나서기 전에 마지막으로 손을 씻고 세수를 한다. 손톱을 깎고, 귀를 파고, 이를 닦는다.  몸 안에 숨어든 이를 잡듯이 몸 구석구석을 될 수 있는 한 깨끗하게 씻는다. 언제 이렇게 - 물 걱정 없이, 비누 걱정 없이 - 씻을 수 있을지 장담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떨 때는 깨끗한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기도 하다. 그리고 화장실 거울 앞에서 내 얼굴을 바라본다. 그 생김새는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 기실 어머니 얼굴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 그대로 배어 있다. 거울 속 표정을 무덤덤하게 한대도, 실눈처럼 눈을 가늘게 떠본대도, 마구마구 먹어대서 살을 덕지덕지 붙인다 해도, 타고난 얼굴꼴을 바꿀 수는 없다. 아무리 신실한 믿음이 있다고 해도, 아버지를 꼭 빼닮은 길고 짙은 눈썹과 그 사이에 -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도 - 나이가 들면 깊게 파일 주름살의 골을 없애버릴 수는 없다. 마음만 먹는다면 아버지를 죽일 수도 있다(어리지만 운동으로 다져진 현재의 내 육체는 그 정도는 가뿐하다). 어머니를 기억에서 영원히 지워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 나의 정신과 육신을 만들어낸 기원인 - 그들의 유전자를 도려낼 수는 없다. 그걸 도려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나 자신을 내 안에서 도려내는 것밖에는 없다. 

 

>>> 역시나 비유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아니, 거의 없다고 봐도 됩니다. 되레 "스푸트니크의 연인"을 읽은지 얼마되지 않아 제가 되레 비유를 생각해보려고 애써 봤습니다. 어처구니 없는 비유지만, "몸 안에 숨어든 이를 잡듯이 몸 구석구석을 될 수 있는 한 깨끗하게 씻는다" 이런 식으로 집어넣어 봤습니다. 기법의 분석, 즉 하루키가 비유를 쓰는 것을 좋아하는구나, 라고 분석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자신의 글쓰기에 자연스럽게 녹여내서 나만의 비유를 구사하기란 쉽지가 않는 듯싶습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연습하다 보면 하루키 정도는 아닐지라도 나쁘지 않게 비유를 사용하는 날이 찾아오리라 믿습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