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로 꾹 눌러 쓴 글은 또 얼마만인가? 나는 악필이라서 사실 연필로 쓰는 것을 그닥 선호하지 않는다. 아니 생각해보니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에는 늘 메모지와 볼펜을 들고 다녔으니, 원래 나는 연필쟁이(아니, 정확히 말하면 지금 볼펜이지만, 비유적으로 연필이라는 표현을 유지하겠다)였던 셈이다. 또 골똘히 생각해보니, 본격적으로 블로그를 시작한 것은 스마트폰 덕분이었던 것 같다. 순간순간 번뜩이는 생각들을 블로그에 기록하기 시작하면서, 지옥같은 출퇴근길을 버틸 수 있었다. 오히려 출퇴근길이 부족한 순간도 있었으니, 칙센트미하이의 "몰입" 이론을 배우지 않더라도, 진정한 몰입의 경지에 나는 이미 도달했었는지도 모른다.
갑자기 대학시절이 떠오른다. 대학동기 한 녀석 중에 늘 스케치북과 4B연필을 들고 다니는 친구가 있었다. 오대오 가르마에 어깨까지 내린 먹물머리. 장국영(장국영 아시나들?) 머리라고 해야 할까? 남자 녀석인데 키도 160이 안되는 자리몽땅한 친구가 공강시간마다 벤치에 앉아 대학캠퍼스 정경을 스케치했다. 늘 똑같은 네모난 건물에, 늘 똑같은 가로수였는데, 당최 무엇을 그리는지는 아직까지 모르겠다(그닥 친하지 않아서...). 근데 늘 오른 다리는 왼쪽 무릎 위로 꼬아 그 위에 스케치북을 45도 각도로 기울여 그렸다. 그림을 다 그리고는 한켠에는 늘 무엇인가 메모를 하였다. 역시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십년이 넘은 지금도 모른다(그닥 친하지 않아서... 졸업후 한 통의 연락도 없었고, 그 흔한 우연한 조우도 없었다). 그 친구는 지금 무얼 하려나.
그 친구를 따라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어릴적 나도 지독한 메모광이었다. 정확히 얘기하면, 대학 시절의 나다. 우연히 접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은 천재되기 프로젝트에 대한 책. 그 책에서 왜 다빈치가 천재성을 발휘하게 되었는지를 갈기갈기 해부한다. 그 중 하나가 메모였다. 떠오르는 단상들은 기록하지 않으면 날아가버리니, 늘 기록할 수 있도록 메모지를 가지고 다녀라. 귀가 얇은 나는 그 지침(?)을 곧이곧대로 따랐다.
사실 생각의 흐름대로 떠오르는대로, 한치의 퇴고 없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상당히 운치가 있다. 스마트폰으로 글을 쓸 때는 나의 생각의 속도를 손이 못 좇아옴에 아쉬움에 있었다. 덕분에 글이 간결햇다. 최근에 피씨에 앉아 글을 쓰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나의 생각의 속도를 오롯이 따라올 수 있다는 말이다. 원래부터 수다스런 나의 속성을 닮아 글이 주렁주렁 길어지고 말았지만. 그리고 최근에 이렇게 연필로 글을 쓰고 있다.
어떤 맛이랄까. 나이 지긋하신 대작가들은 아직도 원고지에 글을 쓰는 것을 선호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왠지 그 분들과 함께 호흡하는 기분이 든다. 몹시 강력하지는 않지만, 내 오른손 손끝에서 쉼없이 뿜어나오는 나의 정신들이 직접 눈으로 보이는 듯하다. 이게 말로 표현하기기 참 어려운데, 나의 뇌가, 나의 가슴이 만든 생각들, 말들을 투박한 기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나의 손끝으로 빚어낸다는 기분이다. 마치 도자기를 빚듯이.
무협지 영웅문의 김용 작가. 지금은 별세하셨지만, 내 또래 남자애들에게는 신적인 존재였다. 그에게 글 잘 쓰는 법에 대해 질문을 했단다. 김용 작가 왈, 나는 글을 쓰기 전에 등장인물이 실제로 만져질 정도로 생생하게 상상을 합니다. 일단 그네들이 실제 인물처럼 그려지만, 이제는 가만히 내버려둬도 그네들이 알아서 움직입니다.
작금에 나도 소설이라는 걸 써 볼려고 한다. 그런데 진도가 잘 안 나간다. 김용 작가의 조언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어제 오늘은 문득 다른 생각이 든다. 어쩌면 손으로 눌러 쓰지 않아, 나는 그네들을 더이상 빚어내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글이 잘 써지지 않는 당신이라면, 지금 당장 폰과 피씨를 끄고, 연필을 쥐어라. 연필이 그대의 글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빚어낼지도 모를 일이다.
* 이 글은 실제로 연필(볼펜)으로 꾹 눌러쓴 글을 거의 그대로(99% 일치), 타이핑만 한 글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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