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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리뷰

소설 "아르헨티나 할머니" 속 감동적인 문장들 (ft.요시모토 바나나)

by 북노마드 2022.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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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가 죽었을 때, 내게서 평범한 세계는 사라졌다.
그 대신 지금까지 커튼 너머에 있던 어떤 굉장한 것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이란 정말 죽는 거네, 아주 평범했던 하루하루가 순식간에 달라질 수도 있는 거네. 그 지지부진하고 따분했던 감정들이 모두 착각이었어. 깊은 슬픔 속에서도 매일, 신선한 발견이 있었다. - 아르헨티나 할머니 p.7

# 외동딸인 내가 엄마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무엇을 얻었는지는 뭐라 정확하게 표현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내 눈동자에 늘 깃든 어떤 빛으로 표현할 수 있다. 거울을 보면 내 눈에 전에는 없던,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커다란 힘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커다란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과, 이가 덜덜 떨리는 공포와, 평생 뇌리에서 떠나지 않을 병원 복도의 어두운 풍경을 본 대가로. - 아르헨티나 할머니 p.12

 



# 그는 젊었을 때는 석공을 아버지처럼 섬기며 하라는 대로 두말없이 움직였고, 매일같이 온종일 작업장에서 수건으로 입을 막고 돌가루와 씨름하다가 자기 전에야 겨우 허리를 펴고 목욕을 하는 생활을 했다. 독립한 후에는 고용한 장인들을 관리하고 손님을 응대하느라 바빴고, 그러다 가끔 술을 마시러 가고...... 그런 아빠의 인생에 추상이 발 디딜 틈은 전혀 없었을 터였다. - 아르헨티나 할머니 p.19

- 추상. 책을 읽어야 성공한다는 말이 지나치게 세상에 많다. 책을 한 자도 읽지 않는 사람들은 성공하지 못 할까. 아니 성공의 잣대가 아니더라도, 다독가보다 인간관계에 서투르고, 인생을 풍요롭지 못하게 사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책을 덜 읽는 사람들의 인생에는 추상이 덜 할 것이다. 멍 때리면 깊은 사색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책을 별로 읽지 않는 사람은 구체와 더 많이 만날 것이다. 그들은 책 대신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실제적인 어떤 경험을 통해서 인생을 배워나갈 것이다. 마치 석공이 하루종일 돌가루와 씨름하듯이 말이다. 내 아버지는 낮에는 김과 고추, 마늘, 콩과 씨름하고, 밤에는 신문과 씨름했다. 구체와 추상을 모두 잡은 인생이니 누구보다도 풍요롭게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야 마땅할 것이지만, 내 보기에 - 무엇보다 아버지 스스로 당신의 인생을 봤을 때 - 만족스런 인생을 살아내지 못했다.

# 사람은 죽는 순간까지 살아 있다. 절대 마음속에서 미리 묻어서는 안 된다.
이것도 내가 아르헤니나 할머니에게서 배운 것이다.
아르헨티나 할머니의 진짜 이름은 '유리(일본어로 나리꽃이라는 뜻)'였다.
그래서 나는 꽃 가게에서 나리꽃을 보면 늘 눈물을 머금게 된다.
그리고 눈물을 머금은 후에는 반드시 빙그레 미소 띤 얼굴이 된다.
슬픔과 그리움보다 즐거웠던 일들이 무수히 되살아나고, 아무리 복잡한 길거리에서도 그날의 날씨에 상관없이 신선한 공기가 싸하게 가슴으로 흘러 들어온다. 마치 기적처럼.
그리고 가슴 언저리가 노르스름하고 따스한 빛으로 채워지고, 행복이 찡하게 온몸으로 번진다. - 아르헨티나 할머니 p.23~24

- 마치 그녀의 생각이 이 책 속에서 비롯된 것만 같은 기분이다. 그녀가 이 책을 곧이곧대로 믿고 신봉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생책이라는 것은 원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속성과 꽤나 잘 맞으면서도 더욱 그 생각을 발전시키고 확장시키게 하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애초에 그녀의 영혼 속에는 이런 생각들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책을 통해 언어화되어 더욱 또렷해졌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문득 그녀는 어떻게 이 책을 읽게 되었을까, 궁금해졌다. 우연히 서점에 들렀다가 책 표지가 이뻐서 우연히? 누군가가 선물을 해 줘서(이럴 경우 시기질투는 언제나 별책부록이다)? 어떤 경로든 그런 것은 어떤 영혼의 끌림이지 않을까 싶다. 지금 내 영혼이 너를 원하고 있어, 그 메시지가 주위로, 주위 사람들에게, 그리고 우주로 펼쳐나가 그녀의 눈 앞에 너, 그러니까 이 책이 나타났을 것이다. 이 책이 지금 이 순간 내 눈 앞에 놓여 있는 것도 - 그런 식의 - 어떤 우주적 힘이 작용한 것은 아닐까.

 



# 그리고 아르헨티나 할머니가 끼익 문을 열었다. 엄청난 매부리코였다. 세모꼴 콧구멍에, 짙게 그린 아이란인. 입술은 정열적인 빨강이었다. 낡아 빠진 검정 모직 원피스를 입고, 가짜 진주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어머나 너는! 미쓰코 아니니!"
아르헨티나 할머니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 냄새나는 얼룩투성이 옷으로 나를 감싸고 꼭 껴안았다. 옷 안으로 깡말라 뼈가 불거진 몸이 느껴졌다.
"엄마가 돌아가셔서, 힘들었지, 정말 대단했어. 혼자서 많이 힘들었을 거야. 아빠에게서 네가 정말 훌륭했다는 얘기, 몇 번이나 들었단다. 그래서 그런지, 처음 만나는 것 같지 않구나. 그리고, 만나면, 이렇게 꼭 껴안고 장하다고 말해 주려고 했단다."
주문처럼 그렇게 말하면서 아프헨티나 할머니는 내 머리를 살며서 쓰다듬었다. 그 옷에서 곰팡이와 태양과 먼지와 인간의 기름 냄새가 났다. 나는 숨이 막힐 것 같고 역겨웠는데, 어째서인지 눈물이 나왔다. - 아르헨티나 할머니 p.39

- 보잘 것 없는 것에서 우리는 문득 감동을 느낀다. 외모도 볼 것 없고, 냄새도 역겨운 사람이 던지는 위로의 말은 어쩐지 대단히 힘이 서려 있다. 이런 걸 반전이라고 해야 할지, 명확한 정의는 서지 않지만.

# "다음에 탱코 스텝 가르쳐 주세요."
나는 말했다.
"물론 가르쳐 주고말고! 아빠도 요즘 배우고 있거든."
유리 씨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도 모르게 두 모금째 마시던 차를 뿜어내고 말았다.
"같이 추면 되겠다. 보름달이 뜬 밤에, 옥상에서 음악 틀어 놓고, 그쵸!"
유리 씨의 "그쵸."에 아빠까지 "음."이라고 말했다.
춤추는 아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너, 나는 그저 놀랍기만 했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사람에 빠져 미치기라도 한 것일까?
하지만 아빠는 원래가 그런 사람이었고, 직업이란 틀에 갇혀 있다가 해방된 것뿐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빠는 원래는 조각가가 되고 싶었다는 막을 종종 했었다.
인생의 톱니바퀴가 하나만 어긋났어도, 어쩌면 파리 같은 곳에서 이런 분위기의 여자와 함께 이런 생활을 했을지도 모른다. - 아르헨티나 할머니 p.46~47

# 그 후 난 고기와 우유와 쌀 같은 먹을거리를 들고 가끔 그곳을 찾게 되었다. 딸이니까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유리 씨와 너무 가까이 하다 보면 아빠처럼 휘말릴지도 모른다는 노파심에 적당히 날을 건너뛰곤 했다.
가기 전에는, 추운 말 알몸으로 갑자기 온천에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용기가 필요했다.
그 어두컴컴하고 냄새나고 지저분하고, 그리고 정체된 공기.
하지만 언제든 오 분만 지나면 익숙해졌다. 마침내 나는 아르헨티나 빌디엥서 밥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 아르헨티나 할머니 p.57

# 죽은 사람을 위해서 일해 왔지만, 그것은 살아 무덤을 찾는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고. 그래도 죽은 사람이 안심하고 잠들게 하는 것이 우선적인 목적이었다고. 그런 일은 지금까지 할 만큼 했으니까, 앞으로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마음을 기댈 자그마한 것들을 만들고 싶다고. - 아르헨티나 할머니 p.74

# "벚꽃이란 것도 실체가 없지 않을까."
아빠가 말했다.
"정말 아름다운 여자는, 보고 또 봐도 어떤 얼굴인지 기억할 수 없는 법이지."
"유리 씨 말하는 거야?"
"그래."
"야 참...... 멋진 일이네."
나는 놀리는 마음을 말했는데, 아빠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아.
"매일 보는데도 도통 종잡을 수가 없고, 어떤 얼굴인지 잘 모르겠다. 얼굴 주위에 뭐랄까......."
(중략)
탱고를 추고, 고기를 꼬치에 끼워 굽고, 아주 매운 소시지를 만들고...... 유리 씨는 어느 모로 보나 외국인이었다. 그런데도 아빠는 그녀 아에서, 그리운 어떤 것을 보았으리라. 그립고, 또 영원한 것을.
나 역시 어렸을 때는 엄마에게서 똑같은 것을 느꼈다. 어른이 되어서는 확실하게 한 여자로 보였지만, 어렸을 적에 엄마는 늘 부드러운 막 저 너머에 있었다. - 아르헨티나 할머니 p.75~76

# 마지막으로 (그러니까 나의 배다른 동생을 낳고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심장 발작으로 죽기 전에) 유리 씨를 만났을 때도 모든 것이 여느 때와 같았다. 왼팔이 저리다고 해서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비듬 낀 머리칼도 이제는 불쾌하지 않았다.
"어유 시원하다, 미쓰코는 정말 천사야, 언제나 귀엽고 상냥한 나의 천사."
유리 씨는 방실방실 웃으면 뚱딴지같은 소리를 했다.
나는 부끄러워서 유리 씨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따스한 등으로 나지막하고 부드럽게 그러나 확실하게 뛰는 심장의 소리가 들렸다. 내게 마지막 막을 선사하듯, 분명하고 부드러운 소리.
그 소리는 아직도 내 귓가에 자장가처럼 남아 있다.
밀려오는 파도 소리처럼. - 아르헨티나 할머니 p.78~79

# 한없이 먼 이국을 여행하는 것이나 자기만의 유적을 만드는 것이나 그 시도의 근원은 같다고 생각한다. 어떤 시대에서 어떤 시대로 여행을 하고, 끝내는 사라진다. 영원 속에 소박한 저항을 새기는 것, 그뿐이다.
동생은 유리 씨를 닮아 코가 뾰족한, 고집스럽지만 아주 상냥한 사내아이다. 동생에게 받은 것도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지금까지 이 세상에 없던 사람이 어떤 인연으로 이 세상에 찾아와 나를 좋아해 준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 -아르헨티나 할머니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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