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라 바쁘지만 - 예전만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는 않지만 - 짬짬이 시간을 내어 책을 읽고 있습니다. 일전에 말씀드렸지만 그 일등공신은 전자책입니다(북적거리는 전철 틈 사이로 삐죽이 스마트폰을 들어 올려 읽는 독서 감각을 저는 사랑합니다).
최근에 읽었던 책은 이문열씨의 중편소설 "금시조"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도의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 이상 개인의 성향과 예술작품과는 별도로 본다는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있어, 흔히 반(反) 이문열파가 가지고 있는 편견은 별로 없었지만,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아 그의 소설을 거의 읽지 않았습니다(아주 어릴 적에 TV에서 무척이나 재밌게 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원작이 단편소설이라는 걸 알고 읽어본 적은 있지만 그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문열씨의 작품을 왜 찾게 되었냐구요?
제고와 도모 때문입니다.
연말에 몰아서 보고서를 만든다고 할 정도의 부서에서 일하고 있는데, 제가 만든 보고서를 보더니 팀장님이 저를 불렀습니다.
"여기 말이야. 효율성 제고, 보다는 도모가 낫지 않아?"
속으로는 제고나 도모나 무슨 차이가 있냐 싶었지만, 인사평가 시기라 고개를 끄덕이면서 '도모'로 수정했습니다. 이후에도 비슷한 일들이 꽤 있었습니다.
"일관적, 보다는 체계적, 이 낮지 않겠어?"
그렇게 수정을 하면서도 한 번의 수정도 없이 통과되는 보고서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 팀장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녀석, 이런 용어도 쓸 수 있었나), 언제까지 '제고', '도모', '함양' 이런 말들을 돌려써야 하나, 하는 스스로를 애처로이 여기는 마음이 겹쳐졌던 것 같습니다.
그때 번뜩 떠오른 게
한자어가 많이 들어간 소설
이었습니다. 생각의 꼬리를 물다가 이문열씨가 '사람의 아들'의 개정판 서문에 썼던 글이 퍼뜩 떠올랐습니다.
# 먼저 나는 급조한 현대 추리물 액자를 씌워 완전하고 절대적인 존재에 다가가는 주인공의 진지한 추구와 간절한 탐색과정을 감쌀 당의로 쓰기로 했다. (중략) 영탄이나 회억, 그리고 과장된 비애 같은 것들로 화려하게 직조된 선지자들의 불꽃같은 예언과 여러 아가며 애가와 잠언들에서 그토록 찬연하던 비유법에도.
이 사람이다, 이 사람의 소설을 읽어야겠다, 싶어 선택한 책이 바로 이 책 "금시조"입니다.
이 소설에서 잘 몰라서 찾아본 단어들을 나열해 보겠습니다.
- 행하, 내지인, 대두박, 지음, 호도, 흔연, 송기, 관상명정, 이물, 임모, 섬짓, 혼곤, 마군, 음험...
더 있지만 제 밑천이 드러날까 봐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보시다시피 한자어가 많이 있습니다. 순수 우리말을 사랑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한자어를 배제하면 간결함과 효율성을 져버려야 하고, 풍부한 언어생활을 포기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누구누구를 연기라는 깔 게 없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이문열씨도 그의 정치 성향이 어떻든 간에 필력 하나는 알아줘야 할 것 같습니다. 그의 글을 보면 잘 지어진 하나의 건축물을 보는 것 같고, 제가 적고 있는 한 자 한 자가 어쩐지 낯부끄러워집니다. 필력뿐 아니라, 재미까지 있어 출근길에 세계고전을 읽는 아침 루틴까지 져버리고 소설에 흠뻑 빠져들었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금시조"를 한 번 펼쳐보시기 바랍니다. 중편소설이라 읽기에 그다지 부담스럽지도 않습니다.
또 당분간은 이문열씨에게 빠져들 것만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드는 날입니다.
그럼 항상 행복하세요!
# 예술의 본질을 다룬 이문열의 중편소설. 1982년 제15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서예의 정상인 석담(스승)과 고죽(제자)의 일대기를 다룬 단편이다. 두 주인공은 각각 전통적 예술론과 순수예술론을 대변한다.
이 작품은 「들소」, 「시인」 등과 함께 작가 자신의 예술에 대한 신념을 소설화한 이문열의 대표적인 '예술가 소설'이다. 작중의 주된 갈등은 서예에 천부적 소질을 지닌 고죽(古竹)과 그의 스승 석담(石潭) 사이의 서로 다른 예술관으로 인해 발생하는데, 이를 통해 작가는 참된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 출처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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