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2016년 미디어를 들썩이게 만들었던 그녀. 한국인 최초로 맨부커상을 수상한 그녀.
당시는 소설을 전혀 읽지 않았던 때라, 당연히 스쳐 지나가는 기사들이었다. 2021년 들어 본격적으로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때도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은 대문호들에 밀려 나에게 홀대 받던 그녀였다.
지나치게 세계 고전류를 읽어온 탓에 번역체에 역겨움이 난 탓인지, 아직도 읽어야 할 위대한 소설들이 잔뜩 있음에도 어떤 책도 그다지 손에 잡히지 않는 몇 달의 시간이 있었다. 그러다 그녀의 책을 갑자기 읽고 싶어졌다. 이유는? 그냥 예감이랄까.
내가 손에 든 한강의 첫 작품은 '채식주의자'가 아닌 '붉은 닻'이었다. 제목 옆에는 서울신문 등단작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었다. 스마트폰 화면 위 아래로 나열된 그녀의 단편소설 제목 중에 예감적으로 끌려 손이 간 작품이 그녀를 지금 우리 앞에 있게 만들어 준 그녀의 데뷔작이었다.
붉은 닻은 직장을 다니고 있던 동식이 남동생 동영의 제대 소식을 듣고 까닭 없이 아픈 장면으로 시작한다. 동영이 개망나니라서 그런가, 아니면 형제간에 넘지 못한 선을 넘었던 것일까.
한때 꽤나 번화하던 학원가 거리였지만 학원이 망하면서 닫힌 철문만이 잔뜩 보이는 거리 끝에서 조그마한 문방구를 하는 동식의 어머니는 - 그런 동식의 속도 모르고 - 동생과 같이 소풍을 가자고 신나한다.
동식은 대학을 막 졸업하고는 폭음과 오입질로 간경변이 진행되어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동영은 군대에서 3년간 - 중간중간 휴가를 나오지만 - 집에는 한 번도 찾아오지 않고 몸은 괜찮아, 라는 안부 전화만을 드문드문했다.
돌아온 동영은 자주 소리 없이 자취를 감춘다. 밤 늦게서야 귀신처럼 돌아와 얼어붙은 몸뚱이 그대로 바닥에 몸을 던진다. 어머니와 동식은 동영의 옷가지를 벗기고 이불을 깔아 동영을 옮긴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어릴 적부터 동영은 소리 없이 사라졌고 언제나 밤 늦게 유령처럼 돌아왔다.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살 거야, 이럴 거면 우리 가족 인생에서 꺼져 버리라고, 소리치고 싶은 걸, 동식은 자정이 다 될 때까지 문방구 문을 열어두고 모로 누워 선잠에 빠진 - 이제는 완전히 백발이 되어 버린 -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고는 꾹 참는다.
술에 취해 밤 늦게 돌아와 동식의 볼을 꼬집고 엉덩이를 때리고 불알을 만지던 아버지는, 어느 날 계곡물에 빠져 시체로 발견된다.
마침내 동식과 동영, 어머니는 - 어머니가 원한대로 - 소풍을 간다. 파도 하나 치지 않는 갯벌가. 심지어 파도 소리도 없고, 하얗게 부서지는 거품 역시 없다. 그곳에는 버리진 수많은 목선들이 있고, 그 아래 검붉에 녹이 쓴 닻이 있다. 동영은 휴가 때마다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동영과 어머니가 개흙을 매만지고 있던 사이 동영이 또 사라졌다. 동식은 또 다시 두려움에 휩싸인다. 조금 전 닻들이 모여 있는 곳에 동영이 서 잇었다. 어둠 속에서 동영이 물었다.
"형은 왜 아팠어?"
"왜 술을 마셨어?"
동식의 입술이 얼어붙었고 동영은 구두를 벅소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책을 덮은 뒤 둔탁한 무엇인가 가슴을 쳤다. 사실 명확한 이야기 구조를 머릿속에 잡히지 않지만 먹먹하다. 흐릿한 인상을 요리조리 꿰어보면 아버지가 늘 술에 취해 폭력을 휘둘렸고, 그게 싫어 동영은 늘상 가출을 했고, 어쩌면 동식은 아버지의 그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본인 또한 술에 취해 동생 동영을 어떻게 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손뼉을 탁- 치면서 한강이라는 사람이 궁금해졌다. 그녀의 느리면서도 그러면서 진솔한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어쩐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숏폼이 유행하고, 핵심을 간결하면서도 효과적으로 전달해야 하는 세상 속에서 그녀의 인터뷰는 각별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다 오랜만에 하늘을 올려다봤다.
거참, 빨리 좀 내리시지, 빨리 좀 갑시다, 라고 입밖으로만 꺼내지 않았지, 각박해져 있던 내가 보인다. 진실한 글의 힘을 느끼는 저녁이다.
# 한강 작가의 인터뷰 영상, 남겨 드려 봅니다. 따스한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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