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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리뷰

한강 작가의 단편소설 : "저녁 빛"

by 북노마드 2023.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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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에는 소주병을 들고, 한 손에는 우산을 거머쥐고 비포장도로를 걷고 있는 남자가 있다. 얼마 안가 우산살이 뒤집어져 우산과 술병을 내던진다. 비가 하염없이 쏟아진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

 

 

재인은 가까스로 버스에 올라탄다. 다시는 이곳을 찾지 않을 테다.

 

칠년이 흐르고 재인은 다시 그 버스에 올랐다. 그날처럼 비가 쏟아졌다. 버스에서 내리가 비가 그쳤다. 왼손에 든 검은 비닐 봉지 속에 든 두 홉들이 소주병을 꺼내 들었다. 병따개를 깜빡 잊어버려 어쩔 수 없이 어금니에 소주병을 갖다 댔다. 그대 상처 입은 짐승 같은 울부짖음이 들린다.

 

재인아아아.

 

형 재헌은 술을 마실 때면 소주병을 어금니로 갖다 대곤 했다.

 

 

형은 병따개도 안 갖고 살아?

 

이제 그만 나랑 같이 서울로 가. 그림이야 서울에서도 그릴 수 있잖아. 여기 풍경이 그렇게 좋으면 먼 거리도 아닌데 이따금씩 와서 스케치해가면 되잖아. 형만 돌아온다면 아버지는 편안히 주무실 수 있을 것만 같아.

 

재인이 거기까지 말하자, 재헌이 메마른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 조그만 배 한 척 사려고 한다.

 

재헌은 재인보다 일곱 해 먼저 태어났다. 나이차 많은 형제가 으레 그렇듯 유년기 재헌은 재인에게 아버지와 형 중간쯤 되는 존재였다.

 

 

중학교 시절, 재헌은 늘 화구를 끼고 살았다. 재헌의 고등학교 입학 선물로 아버지는 유화물감을 사 주며 어머니에게 속삭였다.

 

저 녀석, 틀림없이 박수근 선생 같은 화가가 될 거야.

 

그림 밖에 모르던 재헌이 발광을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졸업반 시절이었다. 학교의 온갖 시설을 부숴버린 재헌이 집에 돌아와서는 아버지를 잡아 먹을 듯 노려보면 소리쳤다.

 

제가 왜 미쳤느냐구요? , 피 때문이죠. 당신이 그 가련한 여자를 미치게 했어요. 나를 낳은 그 여자!

 

너 이자식, 이 자식이…!

 

나는 손 한번 잡아볼 수 없었어요,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죽어 있었으니까….!

 

 

왜 그랬어요? 당신은 인간도 아니야. 한꺼번에 두 여자를 불행하게 했어. 재인이를 낳으려고 또 어떤 여자 인생을 망쳐놨지? 더러워. 구역질이 난다구!  잘못 태어났어 !

 

새해를 알리는 제야의 종소리가 울린다. 서른이다. 재헌은 스물아홉 살에 죽었다. 이제부터 재인은 재헌이 맞이한 적이 없는 나이를 살아가야 한다.

 

아버지에게 그렇게 소리를 치고 집을 나온 재헌은 외딴 바닷가 마을에 자취방을 얻어 매일 그림을 그렸다. 재인이 재헌을 찾을 때마다 재헌은 재인을 꼼짝도 하지 못하도록 앉혀놓고 자신의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렸다. 좀이 쑤셔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완성된 자신의 초상화를 재인이 달라고 하면 재헌은 단호하게 그림을 빼앗으며 말했다.

 

나중에 한꺼번에 줄게.

 

그것은 재헌의 작별 인사인 셈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도 이젠 잘 간수할 수 있어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재헌은 자취방에서 온갖 그림들을 걸어두었다. 그 선연한 붓자국이 아쉬워 재인이 물었다.

 

국전이나 뭐 그런 데 한번 내보지 그래?

 

그럴 때마다 재헌은 아무렇지도 않게 곧 태워버릴 거야라고 답했다.

 

재헌의 발광이후 아버지는 얼굴에서 웃음을 잃었다. 아버지가 재헌을 낳은 여인을 버린 것이 아니었다. 재헌을 낳은 여인은 노름과 구타벽이 있는 남자와 결혼하였다가 학대를 견디다 못해 실성하여 병원에 감금되었다. 의젓하게 자라나는 재헌을 볼 때마다 뿌듯함과 동시에 피어나는 죄의식 때문에 그녀의 여동생에게 매달 병원비를 송부해 주고 있었다.

 

군대를 간 재헌은 만기의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돌아온 그의허벅지와 등과 옆구리에는 깊은 피멍이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발광이 이어졌다.

 

어머니. , 어머니.

 

 

재인아아.

 

재인아, , 날 좀 붙잡아줘.

 

재인의 어머니가 숨을 거두기 전날 재헌을 불렀다.

 

엄만 한번도 너를 내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주님께서 너를 보살펴주실게다.

 

어머니는 죽었다. 재인은 진지하게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나아질 수 없으리라는 생각, 자신의 인생에서 빛나는 것들은 모두 지나버렸다는 상념들이 그를 사로잡았다.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묻은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자 두번째 발광으로 병석에 누워있던 재헌이 말했다.

 

재인아, 나갔다 오는 길에 스케치북 한 권만 사다다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 마을로 내려갔다. 아버지는 붙잡지 않았다.

 

어느 날 재헌은 고깃배를 샀다. 그런데 재헌이 바다로 나가고 나서 돌아오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깊은 그 마을로 내려왔다. 아버지는 재헌이 사라진 그 순간까지 침착했다.

 

생각해봐라. 이렇게 죽을 것이었다면 무엇하러 그렇게 열심히 그림을 그렸단 말이냐?

 

재인은 애써 아버지 말을 믿었다. 그렇다, 죽을 거라면 왜 그림을 그렸겠는가.

 

이튿날 아침 재헌이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한달 뒤 아버지는 죽었다. 교단에서 분필을 줍다가 뇌일혈로 쓰러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재인은 거푸 두 잔을 마셨다.  남은 술을 병째로 바다 멀리 흩뿌렸다. 서른 살의 동생이 스물아홉 살 먹은 형에게 술을 따른다는 심정으로.

 

재헌의 시신을 고르던 날, 젊은 염장에게 아버지는 소리쳤다.

 

그만 두시오. … 그 팔을 그대로 두란 말이요.

 

바람이 거세어졌ㄷ. 축축한 바람이 재인의 몸 속으로 스몄다. 등뼈가 오그라들었다. 모든 근육과 내장들이 성내며 사방으로 튕켜져나갔다. 그는 어두운 하늘을 향하여 고개를 치어 들었다.

 

한강 작가님의 단편소설 저녁 빛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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