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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리뷰/김훈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현실을 그리다 - 김훈의 "공터에서"

by 북노마드 2021.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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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작가의 - 내가 읽은 - 네번째 작품이다.

달 너머로 달리는 달, 남한산성, 흑산, 그리고 이 작품.(*맨처음 접한 작품은 "남한산성"이었는데, 읽다가 말았고, "연필로 쓰기"는 김훈의 산문집인데 얘도 읽다가 말았으니, 완독기준으로 정렬해 보면 이와 같다)

공터에서.

출처 : https://blog.naver.com/parkyang2018/221953726088

흔히 김훈 작가의 필체를 남성적이고 거칠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기자 출신의 건조하고 간결한 문체 탓인가 싶었다. 확실히 김훈 작가의 글은 간결하지만 그래서인지 단어 하나하나가 - 그가 그의 소설 후기에 에필로그식으로 자주 집필 소감을 남기는데, 매번 하는 말이 "겨우 쓴다"는 말이다 - 압축적이라서 그런지 쉬이 읽히지 않는다. 아이러니하지 않는가? 편하게 읽히라고 짧게 쓰라고 가르치는게 대중적인 글쓰기이고, 특히 기자와 같은 언론 글쟁이들이 배우는 방식인데 말이다.

개인적인 생각을 보태자면, 그는 한문을 즐겨 쓴다.

 

한문 자체가 뜻글자이기 때문에 많은 개념과 생각들을 내포한다. 나름 한문 세대(?)인 나도 읽어내기가 버거운데, 짧은 호흡에 익숙하고, 한자 과목은 - 내가 알기로는 - 선택과목으로 배워내는 파릇파릇한 젊은 혈색들에게 김훈 작가의 글이 어떻게 다가갈지 자못 궁금하다. (*혹자는 이를 대중적이지 않고, 시대를 읽어내지 못한다고 평하지만, 나는 세간에 흔들리지 않는 꿋꿋함이 더 좋다. 그래서 끝내 인기를 못 끌더라도. 그래서 후대에 인기를 끌지 못하고 여전히 그냥 고집불통 꼰대로 남더라도.)

계속 그의 소설을 읽다보면 내 글도 그의 영향을 받는 듯싶다.(듯싶다, 듯했다, 는 그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다.) 엥? 간결체라며? 라고 의구심을 던지시는 분들에게 한마디 하지면, 김훈 작가를 접하기 전에 내 글은 더욱이 마침표가 없고 장황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게 그나마 짧게 쓰고 있는 것이다(웃음).

간결한데 쉬이 읽히지 않는 것은 독자의 탓이리라고 작가를 옹호해 보면서, 일견 눈살이 찌푸려지는 부분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글이 남성적이고 거칠다고 말하는 것은 비단 필체에서 우려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가 육체를 대하는 시선 - 특히 여성의 육체(*생식기) - 이 계속 읽다보면 이렇게까지 표현을 해야 하나, 싶을 정도에 이른다.

그는 남성이다. 남성의 전투적인 시선 - 여성을 공략하는 객체로 바로보는 - 이 그의 글에서 읽힌다. 그래서 몹시 불편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네번째 소설인 "공터에서"를 내려놓은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그의 글은 현실 그 자체이다.

살아가는 것은 오감으로 온갖 것들을 경험하기에 행복한 것이에요, 라고 나도 긍정적으로 얘기하고 싶다. 하지만 제아무리 낙천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하더라도 소시민의 삶은 어렵다.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생명체로서 자연스런 것이지만, 그 아이를 먹이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세상의 온갖 잡내를 감내하며 -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 육체를 희생하여야만 받아낼 수 있는 - 물질을 받아내야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나서 어색한 것이 아닐련지 몰라도, 대다수의 범인에게는 잡기 어려운 그 무엇이다.

 

최근의 동학개미 사태를 부정적으로 보고 싶지 않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현실의 안타까운 거울이라고 해석한다. 왜 FIRE(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족이 나오겠는가. 워라밸을 즐기는 신인류. 일보다 삶을 즐기는 밀레니얼족. 이런 말을 붙이기 이전에 나는 그 삶의 어려움을 본다. 그걸 - 그 누구도 대면하기 싫은 - 현실을 김훈 작가는 그려내 버린다. 그의 글이 거친 이유다.

그는 여전히 선술집에서 소주를 마시며 신세를 한탄하는 인류를 본다.

 

그게 계층갈등인지는 나는 잘 몰라도,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그런 인류는 존재했고, 존재하고, 또 존재할 것이다. 그가 남성적으로 여성의 육체를 표현한다고 느꼈던 부분은 이렇게 말하고 싶다.

육체는 실재이고 현실이다. 아름답고 싶지만, 늙어가는게 현실이고, 육체이다.

김훈 작가는 그 육체를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그의 글은 누드화이다. 보신 분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정작 누드화는 야하지 않다.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는 육체의 성장과 쇠퇴, 소멸을 통해 생(生)에 우리가 둔감해지질 않길 바란다.

정작 "공터에서"에 대한 리뷰는 없던 것이 되어 버렸지만(^^;;) "공터에서"도 그 궤를 달리하지 않는다. 공터에서는 다만 역사적 사건이 아닌 우리네 소시민의 이야기이다. 혹자에게는 별 이야기가 아닐 수 있지만, 나에게는 포장마차 소주처럼 가까이 다가왔다.

김훈 작가를 출세길(?)에 이끈 "칼의 노래"는 - 우리가 너무 잘 아는 - 성웅 이순신에 대한 이야기이다. 남한산성도 역사 속의 이야기이다. 그래서인지 김훈 작가를 있었던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 그 특유의 문체빨로 - 능력이 뛰어난 것으로 알았다.

하지만 공터에서를 읽어내면서 나는 김훈 작가를 다시 생각했다.

 

그는 그 누구보다 소시민적이고 일상인이다.

 

그래서 더욱이 - 범인이 범접하기 어려운 - 큰 역사 속에 자신을 투영하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평범한 소시민도 역사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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