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독서법은 애증의 관계는 오래 되었다. 어릴 적 꿈은 - 들으면 웃겠지만 - 천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세상의 모든 지식들을 하루 빨리 습득해야 했다.
어릴 적 소년일보였나? 초딩들이 보는 두세장짜리 신문을 학교에서 매일 봤다. 당연히 나의 관심사는 거기에 나오는 4컷짜리, 8컷짜리 만화였다. 어느날 우연히 신문에 '속독법'에 대한 소개가 나온 것을 발견했다. 어린 나에게는 신천지(!!!)와 같았다. 처음 봤던 속독법은 한 점을 응시하는 것이었다. 눈을 깜빡이지 않고 백지 위에 한 점을 응시하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아무 생각없이 그저 따라 했는데, 지금 돌이켜 보니 눈근육을 단련하여 책의 인쇄된 글자를 빨리 읽어내는 훈련이었던 것 같다. 성이 안 차 도서관에 가서 속독법에 관한 책을 찾아봤는데, 당시에는 사선 따라 보기 등 대다수 안구근육을 단련하는 것이 속독의 전부였다. 물론 혼자서 독학으로 그런 속독의 원리를 깨우치기는 어려웠다. 몇 차례 눈이 시리고, 눈물만 몇 번 쏙 빼고 나서는 관심이 있지만 정복하지 못하는 영역이 바로 속독법이었다.
그러다가 대학시절에 이 책을 발견한다. 폴 쉴리의 "포토 리딩". 책 표지에서부터 광고문구가 현란하다.
'지금보다 책을 10배 빨리 읽는 독서기술'
이 책은 기존의 안구훈련식의 속독법을 뛰어넘는 놀라운 책이었다. 나는 이 책을 아무도 보이지 않게 마치 혼자만의 비기인냥 조금씩 훔쳐보았다. 인간의 잠재능력은 무궁무진하니 자신을 믿고, 신체를 이완시키고 양쪽 페이지가 눈에 모두 들어오도록 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글그대로 책을 사진 찍듯이 보는 방법이다. 책에서는 각종 자격시험에서도 이 방법을 활용하는 팁들이 제시된다. 그 덕분에 많은 응시료를 날렸다.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다가, 나의 독서법에 가장 큰 영향을 줬던 - 현재까지도 - 책이 바로 박웅현씨의 '책은 도끼다'이다. 이 책에서는 느리고 천천히, 자신의 페이스에 맞추어 읽는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게 책을 제대로 읽어내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 방법에 백분 공감했다.
사실 종국에는 평상시 내가 곰곰히 되새겨본 내용들만이 기억에 남기 마련이고, 또 언어로 나올 수밖에 없다. 지금 내가 이 글을 쓰는 와중에서 그래도 속독법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 보고, 적어도 "포토 리딩"이라는 책은 포토 리딩을 배우기 위해서 포토 리딩하지 않고 천천히, 한 글자 한 글자 고민하면서 읽어냈기 때문에 - 지금 저 책을 헌 책방에 팔아넘기고 없는데도 기억에 의존해서 - 이렇게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민법 책을 포토리딩하고 민법시험을 만점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내가 진실로 멍청이 같지만, 인간은 그렇게 비이성적인 사고를 어느 순간 신뢰해 버린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때는 그렇게 믿고 - 믿고 싶었는지 모른다 - 시험을 봤다. 결과는 말 안해도 알 터이다. 물론 이런 일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건 내가 생각해도 실로 대단한 아이디어군, 이게 어디서 봤더라, 뭐 이런 식의 아이디어의 발현 차원에서는 포토 리딩을 통해 슬쩍쿵 접했던 내용들이 도움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 사실 나 자신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그런 1%, 아니 더 프로티지를 높여서 10%를 위해서 99%, 아니 90%의 독서를 대충대충 하느니, 차라리 속독법, 포토리딩을 깔끔하게 포기하고, 진득하게 책을 천천히 읽어내는 것이 인생에 더 도움을 준다고 지.금.의. 나.로.서.는. 확신한다.
물론 일본에는 독서 달인들이 많은데, 그중 다치바나 다카시라는 작자는 매년 1000권의 책을 읽어낸다고 한다. 구입한 책을 보관하기 위한 '고양이 빌딩'에는 20만권이 넘는 책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등의 책을 저술) 매년 1000권이라는 말이 천권이지 하루에 2~3권씩 읽어내는 속도다. 이 사람이 '실전'에 도움이 되는 독서 기술 14개조를 밝힌 바 있는데, 그중 하나가 '속독술을 익혀라'는 것이다. 덧붙이는 말이 '짧은 시간 안에 대량의 자료를 섭렵하기 위해서는 속독 이외의 다른 방법이 없다'이다. 이런 독서 대가들의 말을 들으면, 우리 같은 범인들은 - 특히 나 같은 팔랑귀는 - 또 흔들린다. 역시 속독법이라는 것은 익혀야만 하는 것인가.
또다른 일본의 독서 고수인 마쓰오카 세이고(*지의 편집공학, 독서의 신 등의 책을 저술). 그는 몇 년 전부터 온라인에 매일 밤 한 권씩 독서 감상문을 올리고 있는 <센야센사쓰(천일천책)> 프로젝트(*아라비안 나이트의 천일야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처음에는 1000권을 목표로 시작했으나, 이미 목표를 초과달성함)를 진행 중이다. 그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책속에 풍덩!] 모든 텍스트를 일정한 독서법으로 속도만 빠르게 읽는 것은 독서의 의의가 아닙니다. 그런 마치 음식 빨리 먹기 대회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웃음) 누구나 경험해 보았겠지만,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의 책은 상당히 빨리 읽을 수 있습니다. (중략) 이 모든 사례는 비슷한 내용의 책들은 빨리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며, 이것이 본래의 속독술입니다. 다시 말하면, 읽는 사람이 비슷한 내용이라고 생각하면 그 책이 어떤 책이든 빨리 읽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 독서의 신 p.170
의견이 분분하지만, 저는 속독에 있어서는 확실히 세이고의 편을 들어주고 싶다. 결국 많이 읽으면 절로 속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방법론 쫓아다니면서 나처럼 시간 낭비 마시고, 그 시간에 책 한 쪽이라도 더 보시라.
몇 년 전에 서점에 들렀는데, 그래서 다시는 독서법에 대한 책을 사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는데, 그날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이 책을 샀다. 김병완의 초의식 독서법.
역시나 책 사는 것이 취미인지라, 사가지고 와서는 책꽂이에 묵혀 두었다가 금년초에 다시 꺼내 들었다. 이 책에서 언급한 초서독서법이라는 부분이 내가 독서모임에서 하고 있는 책 구절 베껴쓰기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이게 말그대로 나의 잠재의식에 남아 있어서였는지는 모르겠는데, 사실 전혀 의식해서 한 것이 아니라, 신기해서 다시 읽어보게 되었다.
[책속에 풍덩!] 초서(*'가려뽑다, 베끼다'는 뜻의 '초')를 하면 노트에 한 문장이든 두 문장이든 써야 한다. 놀라운 사실은 쓰는 과정이 '잠시 멈춤'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읽는 행위를 잠시 멈추고, 쓰는 과정을 통해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그 책이 선물하려는 사고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생각하는 훈련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초서를 하면 생각할 기회가 눈으로만 책을 읽을 때보다 훨씬 더 늘어난다. - 김병완의 초의식 독서법 p.125
실은 이 글은 김병완의 초의식 독서법이라는 책을 리뷰하려고 했는데, (나의) 독서법에 대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결론을 말하자만, 확실히 속독법을, 포토리딩을 한답시고 슬렁슬렁 읽는 것보다는, 의식적으로 생각하면서 읽는 것이 많이 남는다. 굳이 베껴쓰기의 기간을 숫자화한다면 5개월 남짓 되었는데 - 김병완식으로 말하자면 초서독서법이다 - 글로 남기다 보니, 단편으로 날아가 버렸을 생각들이 기록으로 차곡차곡 남는다. 사실 이 글도 김병완의 초의식 독서법을 읽으면서 베껴쓰기를 하며 나의 독서법에 대해 되돌아본 생각의 단편들을 묶어본 것이다.
나란 인간도 꽤나 책을 좋아라 하고, 비교적 오랫동안 책을 읽어온 사람이라고 자부한다. 하지만 나의 인생에 어떤 결과물로서 남았느냐를 물어본다면, 물론 안 읽은 것보다는 많이 남았겠지만, 딱히 남는 것이 없다. 그런데 베껴쓰기를 시작하면서, 그 기록들의 집합만으로도 하나의 독서감상문이 되고, 더 나아가 이 생각들을 더 발전시키면 오롯이 나만의 창작물이 탄생할 날도 찾아오겠구나, 라는 막연한 희망도 가져본다.
p.s 이미 잘 하고 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혹시 안하고 계시는 분이라면, 책을 읽으면서 인상에 남은 구절들을 옮겨 적으면서, 그때 느낀 생생한 생각, 감정들을 기록으로 남긴다면, 더욱 알찬 독서생활이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구구절절 길게 글을 남겨 봅니다. 그럼 모두 책을 통해 풍요로운 인생을 가꾸어 나가길 기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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